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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10月1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2024年10月1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8編 29(28)~36(35)節
〇讃    頌     讃頌歌 3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読文       交読文 62 (詩編143編)
〇讃    頌      讃頌歌 93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6章 19~24節
〇説 教      「天に富を積む者の幸い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자의 복)」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9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4年 10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天に富を積む者の幸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章 19~24節

 

 「あなたがたは地上に富を積んではならない。」(19節) この言葉から、今日の聖書箇所は始まっています。
 ユダヤ人たちにとって、富とは、神さまからの祝福と考えていました。神さまの祝福を求めるのは、ごく自然なことです。ですから、富を求めること自体は間違っていません。しかし、求めることと執着することとは違います。それが、富を地上に積むのか、天に積むのかの違いが出て来ます。
 ここで言う富とは、直接的にはお金であったり、物であったり、人が生きるために必要な衣食住に関わるものを指しておりますが、そればかりではなく、その人の人生が目指しているものを表す指標ともなっています。

 

 「富を地上に積む」、この「積む」というのは、お金など、この世の宝を蓄えて置くということです。将来の生活に向けて、お金などを貯めておくことは必要なことです。でも、イエスさまがここで言われているのは、必要以上に貯めることを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しょう。パウロは「食べるにしろ飲むにしろ、何をするにしても、すべて神の栄光を現すためにしなさい」(Ⅰコリント10:31)と言いましたが、今、している「富を地上に積む」ことが神さまに栄光を現すものになっているのか、と疑問を呈し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地上の富について19節でこう言われています。「そこでは、虫が食ったり、さび付いたりするし、また、盗人が忍び込んで盗み出したりする。」(19節)
 当時の富は、織物などの布地で、金持ちは着物にかなりの投資をしたようです。その布地が、ある日突然、虫に食われて穴が開くとか、さびのように変色したりします。また、盗人に盗まれるということもあったでしょう。その例を挙げながらイエスさまは、地上の富は、一時の、はかないものでしかないと言われたのです。
 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富は、天に積みなさい」(20節)と言われます。では、「富を天に積む」とは、一体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

 

 イエスさまはある時、金持ちの青年に対して、「行って持ち物を売り払い、貧しい人々に施しなさい。そうすれば、天に富を積むことになる」(マタイ19:21)と言わ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この金持ちの青年は地上に富を蓄えるをやめ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自分の富を天に積むというのは、自分の所有物を、賢く、快く、喜んで、自発的に、神と神の国のために用いるということです。具体的にそれは貧しい人を顧みることであったり、福音宣教のために献げることです。神さまはその行為を報いてくださいます。この報いが天に蓄えられる富であり、それはしみになることなく、朽ちることなく、永遠に価値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はマタイによる福音書6章33節で「何よりも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これらのものはみな加えて与えられる」(マタイ6:33)と言われています。あくまでも神の国を第一に求める姿勢で自分の富について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献金を献げる場合もそうです。献金というのは、ある意味、神の国への投資なのです。投資ですから、引き算で考えるものではなく、足し算で考えるものです。神の国を第一とする人は天の銀行に蓄えるのです。私たちは天に富を蓄えます。自分の富が天にあるから、私たちはいつも天を見上げる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心も天に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から22節に、「体のともし火は目である」とありますが、よく「目は心の窓」と言ったりもしますが、ユダヤ人は目自体が光りを放つと考えていたようです。この目が体全体を照らすランプの機能を持つというわけです。だから目は澄んで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澄んだ目、すなわち健全な心の目が魂を照らす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この澄んだ目、健全な心の目が、神さまに「二心」でなく、「一心」で仕える人の心の目なのです。それが24節で言われていることの内容です。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ない。」(24節)
 僕として主人に仕えるというのは、一人の主人にパートタイムではなく、フルタイムで仕えることです。主人にはすべての時間、献身的であること、忠誠が要求されます。パートタイムのようにして仕えることは許されません。「4時間だけ仕えますから後の時間は干渉しないでください。後の20時間は他の人に仕えたいのです」などということはできない。「日曜日だけ仕えますから、あとの六日間は別の人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などということもできません。しかも、手抜きとか許されません。いつも献身的に仕えるのです。ですから、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出来ません。主人は一人しか持てません。だから、私たちは仕える対象をはっきりさせ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私たちは誰に仕えたら良いのでしょうか。当然、富ではないはずです。私たちは神さまに一心で誠心誠意、仕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は神さまに対して、キリストに対して、「主」と呼びます。それは「主人」という意味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主人が私たちの生活のすべてを支配する権利を持ちます。主人に対しては、敬う態度が必要であるし、服従する態度が必要です。時間の使い方、お金の使い方、すべての領域において服従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すべの時間は主のためにあるのです。すべての持ち物は主から管理をまかせられているのであって、すべては主のものであるのです。生活に対する一切の権利は主にあるのであって、私たちには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なことを言いますと、「やっぱりキリスト教は堅っ苦しい」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確かに、そういう一面があるかと思います。でも、この主人と僕、神さまと私の関係の間には「愛」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にとって富というのは、まさに「主イエスの愛」であるのです。「あなたの富のあるところ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だ」という言葉の「富」を「愛」に置き換えると、意味がよく分かるかと思います。「あなたのイエスさまの愛があるところ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だ。」

 

 イエスさまが一人ひとりに向かって語りかけ、共にいて、喜びも悲しみも分かち合って下さる。このイエスさまの愛から神さまとの主従関係を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パウロは、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2章19~20節で、「わたし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ます。生き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わたし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ガラテヤ2:19-20)と告白しています。ここには主従関係と言うよりも、十字架のイエスさまとの一体感が告白されています。この十字架に架けられたままのキリストこそが共に、しかも「わたし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という事実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るからこそ、私たちの目は輝き、全身が明る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私たち自身の富みの豊かさだけを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人との関係にも大きく影響を与えるのです。

 

 「天に富を積む」生き方というのは、神さまに一心に仕えることを通して、神さまの愛を輝かせ、この地上における人との関係も、神さまの愛の内に関係づけられていくのです。この6章で読みました「施し」をする時も、「祈る」時にも、「断食」をする時にも、神さまの愛に基づいてなされるならば、それは天に富を積むものになるのです。
 だからこそ、私たちはいつも主の御心を尋ね求める必要があります。「主よ、何をすべきですか、どうすべきですか」と。また「主の御心なら、あのことをしよう、このことをしよう」と。主なる神さまは私たちの主権者であり、私たちは主の栄光のために生かされているのです。皆さん、そこに私たちの心が向かうようにと、今日も主イエス・キリストは招き続けているのです。

 


【2024년 10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자의 복”
                                  마태복음 6장 19~24절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19절) 이 말씀에서 오늘의 성경 부분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보물이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보물을 구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구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느냐, 하늘에 쌓아 두느냐의 차이가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물이란 직접적으로는 돈이거나 물건이거나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의식주에 관련된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그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보물을 지상에 쌓아 둔다”, 이 “쌓아 둔다”는 것은 돈 등 이 세상의 보물을 저장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미래의 생활을 위해 돈 등을 모아 두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저축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는데, 지금 하고 있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의 보물에 대해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19절)
 당시의 보물은 직물 등의 옷감이고, 부자들은 의복에 상당한 투자를 한 것 같습니다. 그 옷감이 어느 날 갑자기 좀먹거나 녹처럼 변색되거나 합니다. 또한 도둑에게 도둑을 맞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예를 들면서 예수님께서는 땅의 보물은 한때의 덧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20절)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태 19:21)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땅에 보물을 저장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을 지혜롭게, 흔쾌히, 기꺼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거나 복음 선교를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에 보답을 해 주십니다. 이 보답이 하늘에 저장되는 보물이며, 그것은 좀먹지 않고 썩지도 않고, 영원히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는 자세로 자신의 보물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을 바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투자인 것입니다. 투자이기 때문에 뺄셈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덧셈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일로 하는 사람은 하늘의 은행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저장합니다. 자신의 보물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라고 하는데,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유대인들은 눈 자체가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눈이 몸 전체를 비추는 램프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은 성해야 합니다. 맑은 눈, 즉 건전한 마음의 눈이 영혼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맑은 눈, 건전한 마음의 눈이 하나님을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의 마음의 눈인 것입니다. 그것이 24절에서 말하는 것의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24절)
 종으로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주인을 파트타임이 아니라 풀타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주인에게는 모든 시간, 헌신적일 것, 충성이 요구됩니다. 파트타임처럼 섬기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4시간만 모실 테니 나머지 시간은 간섭하지 마세요. 나중의 20시간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일요일만 모실 테니, 나머지 6일간은 다른 사람을 모시게 해주세요” 라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건성으로 대충 때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항상 헌신적으로 섬기는 거죠.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주인은 한 사람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길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면 좋을까요? 당연히 보물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한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주”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주인”이라는 뜻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인이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을 지배할 권리를 가집니다. 주인에 대해서는 공경하는 태도가 필요하고 복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시간 사용법, 돈 사용법, 모든 영역에서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시간은 주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물은 주님께 관리를 맡기는 것이고,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생활에 대한 일체의 권리는 주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기독교는 딱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주인과 종, 하나님과 나의 관계 사이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보물이란 바로 “주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는 말의 “보물”을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말씀하시고 함께 하시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과의 주종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는 주종관계라기보다 십자가 예수님과의 일체감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야말로 함께, 더구나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에 우리의 눈은 빛나고 온몸이 밝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풍부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에도 크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한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빛나게 하고 이 땅에 있어서의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 관계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6장에서 읽은 “구제”를 할 때도, “기도”를 할 때도, “금식”을 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마음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또 “주님의 마음이라면 그 일을 하자, 이 일을 하자” 라고.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에 우리 마음이 향하라고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부르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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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4年10月2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