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説 教ページ

2024年10月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2024年10月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2編 24(23)~26(25)節
〇讃   頌   讃頌歌 2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読文     交読文 60 (詩編139編)
〇讃   頌    讃頌歌 363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6章 5~15節
〇説 教      「願う前から (구하기 전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3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4年 10月 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願う前から」 マタイ 6章 5~15節

 

 先週、読みましたように、イエスさまは偽善者のような生き方をしてはならないと言っています。信仰における具体的な行動である「施し」や「断食」については、先週お話しましたが、今日は、「祈り」について考えたいと思います。

 5節です。「祈る時にも、あなたがたは偽善者のようであってはならない。偽善者たちは、人に見てもらおうと、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りたがる。」(5節)
 偽善者たちは、祈る時も、人に見てもらおうとして、人の評価を気にして祈っていると言うことです。自分はちゃんとした信仰者ですということを周囲に知らせようとしているわけです。それは、人に向けて喋っているであって、神さまの方を向いていないわけですから、本当の意味での祈りではありません。ここでもイエスさまは「はっきり言っておく。彼らはすでに報いを受けている」(5節)と言われます。人の評価を気にして祈る、すなわち人からの報いを期待しての祈りは、確かに人から評価や報いを受け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しかし、そんな見せかけの祈りは神さまに届きません。すでに、人からの報いを受けているから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がここでおっしゃっているのは、偽善が嫌いだとか、見せかけの祈りがだめだとかというような問題ではなくて、救いに関する問題、神さまと人との真実な関係に関する問題なのです。つまり、見せかけの信心には人を救う力がないからです。
 人が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は、神さまから報いを頂くからです。それが、人からの報いを期待しているうちは適いません。人からではなく、神さまから報いを得るときに、人は本当に救われます。

 

 イエスさまは6節で、具体的な祈り方を教えておられます。「だから、祈るときは、奥まった自分の部屋に入って戸を閉め、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ことを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報いて下さる。」(6節)

 

 「奥まった自分の部屋に入って戸を閉める。」つまり、独りきりになって祈る。戸を閉めるのですから念入りです。祈りとは、本来、神さまと一対一に向き合うことで成り立ちます。これは、場所や時間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はなくて、本質的に心の問題です。礼拝で祈りをささげる時も、ですから同じです。人に願うのではなくて、神さまを相手に語る。当たり前かも知れませんが、イエスさまが敢えてそう言うのは、案外、当たり前でなくなってしまうからです。たぶん、信仰生活を続けている方々にはよく分かることだと思います。

 

 ですから、私たちは、私の祈りが真実に神さまに向かうものであるのかどうか、私が祈っているのは、真に生きておられる神さまなのかどうか、もう一度省みる必要があります。そこに、祈りが祈りとして成り立つ鍵があります。これは私たちの信仰の本質に関わることで、私たちは祈ることで、今私と共に生きておられる神さまを確認するのですから、これは信仰にとって、つまりそれは、私たちの命にとっての死活問題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7節8節で「あなたがたが祈るときは、異邦人のようにくどくどと述べてはならない。異邦人は、言葉数が多ければ、聞き入れられると思い込んでいる。彼らのまねをしてはならない」(7-8節)と言われます。
 祈りにおいて、言葉数の多いとか、饒舌な祈りというのは必要ありません。言葉数がやたらと多いのは、そう呼びかけなければ神さまが振り向いてくれないと思っているのかも知れません。そして、饒舌に祈らなければならいと思うのは、神さまに自分のことを分かってもらえない、もしくは神さまに認めてもらえないと思っているのかも知れません。つまり、神さまは私のことをご存じないと考えているのでしょう。
 そのため、くどくどと祈ります。しかし、それは言葉で神さまを動かそうと考え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自分の思い通りに神さまを動かすとまでは考えていなくても、言葉数多く、饒舌に祈れば、神さまは聞いて下さるのではないかと、そんな期待があるのは、確かです。

 

 でも、聖書の神さまはそういう方ではありません。特に、イエスさまがここで繰り返し私たちに教えておられるのは、私たちは「父に」祈るということです。「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あなたの父が報いて下さる。」(6節)
 私たちはわけのわからない神のようなものに呼びかけるのではなくて、主イエス・キリストが父と呼ぶ、天の神さまに向かって、イエスさまと一緒になって、父に願います。そして、祈りの前提として重要なことが、8節の後半に書いてあります。
 「あなたがたの父は、願う前から、あなたがたに必要なものをご存じなのだ。」(8節)

 

 神さまに向かって丁寧に私の願いを教えてあげる必要はありません。「わたしたちの父」は、子である私たちのことは何でもご存知です。父なる神さまは、私たちが自分のことを知る以上に、私たちの心の底までご存じで、配慮を尽くしておられます。そういう神さまに向かって私たちはどう祈るのか。どう語りかけたらよいのか。これが、祈る姿勢の基本となります。

 

 ただ、ここで問題になるのが、何でもご存じの神さまに向かって、そもそも祈る必要があ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はすべてを始めからご存じで、神さまが計画されたことが実現するのであれば、別に、祈る必要など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疑問が起こりま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は祈るなとは言われませんでした。くどい祈りは必要ないと言われているだけ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その祈りの手本として、9節以降で、神さまに「こうに祈りなさい」と手本を示されています。これは皆さんもお分かりのように、「主の祈り」の原型になったものです。今日は、時間がありませんから、9節以降の「主の祈り」については触れませんが、私たちはこの「主の祈り」を祈りの手本と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祈りは私たちのために主がくださったものです。私たちは、神の恵みを受け取るために、祈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いただきました。それは、必要があってとか、目的があってではなくて、祈ることとは、神さまとの交わりそのものです。ですから、祈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は神さまが近くにおられるのを知ります。神さまがすでに救いの恵みを用意され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なぜなら、祈りは神さまと心で向き合うことであるからです。

 

 皆さん、私たちには誰にも悩みを相談できないで苦しむときに、聞いて下さる方がおられるのです。その方に私たちは信頼と愛をもって素直に願いを打ち明けます。率直に父である神さまに願って、応えを期待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ただ、祈ればすぐに報いを受けられるとは限りません。多くの場合、神さまの沈黙の前に、戸惑ってしまうでしょう。それでも、祈ることそのものが報いだと言えます。祈ることで神さまとつながっているのですから、すでに大きな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皆さん、祈りを通して、もっと神さまに近づきましょう。神さまに愛され救われた者として、栄光を表す者になって行きましょう。

 


【2024년 10월 6일 주일예배(요약판)】

     “구하기 전에”  마태복음 6장 5~15절 

 

 지난 주에 읽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구체적인 행동인 “구제”나 “금식”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기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절)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즉 남의 평가를 신경 쓰며 기도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확실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주위에 알리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아닙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평가를 의식하면서 기도하는, 즉 남의 보답을 기대하는 기도는 확실히 남으로부터 평가나 보답을 받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겉치레의 기도는 하나님께는 닿지 않습니다. 이미 사람의 보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위선이 싫다거나 겉치레의 기도가 안 된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구원에 관한 문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진실한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겉치레의 믿음에는 사람을 구원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보답을 기대하고 있는 동안은 맞지 않습니다.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답을 얻을 때 우리는 정말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즉, 혼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문을 닫으니 정성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본래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장소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예배로 기도를 드릴 때도 그래서 마찬가지입니다. 남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지 않게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마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기도가 진실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지 아닌지, 내가 기도하는 상대는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인지 아닌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기도가 기도로 이루어지는 열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지금 나와 함께 살고 계신 하나님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즉 그것은 우리의 생명에 있어서의 사활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7절 8절에서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7-8절)고 합니다.
 기도는 많은 말이나 요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의 수가 쓸데없이 많다는 것은 그렇게 호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돌아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요설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거나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즉, 하나님은 나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중언부언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인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말수가 많고 요설하게 빌면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기대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여기서 거듭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우리는 영문을 모르는 신 같은 것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예수님과 함께하여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전제로서 중요한 것이 8절 후반부에 쓰여져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8절)

 

 하나님을 향해 세세하게 내 소원을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식인 우리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알고 배려를 다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까? 이것이 기도하는 자세의 기본이 됩니다.

 

 단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든 알고 계신 하나님을 향해 애초에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이 실현된다면 따로 기도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의 본보기로 9절 이후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라”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주기도문”의 원형이 된 것입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9절 이후의 “주기도문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기도의 본보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필요가 있다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의 은혜를 마련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마음으로 마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도 고민을 상담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이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솔직하게 소원을 털어놓습니다. 솔직하게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보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기도하면 바로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침묵 앞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하는 것 자체가 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큰 보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통해 좀 더 하나님께 다가갑시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영광을 나타내는 자가 되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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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4年10月2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