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0月27日主日礼拝式順・説教
2024年10月2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フィリピ(빌립보서) 4章 6~7節
〇讃 頌 讃頌歌 34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4 (詩編1483編)
〇讃 頌 讃頌歌 536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6章 25~34節
〇説 教 「本当に配慮すべきこと
(정말 배려할 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5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0月 2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本当に配慮すべきこと」
マタイによる福音書 6章 25~34節
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思い悩むな」「明日のことまで思い悩むな」と言います。
イエスさまは、思い悩む弟子たちに、そして私たちに、なぜ「思い悩むな」と言われるのでしょうか。むしろ、将来のことを色々と心配し、出来る限りのことを果たしていくことは当然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時に、思い悩むなと言われれば言われるほど、私たちは素直にこの言葉を受け取ることが出来ません。
しかし、問題なのは、これらの「思い悩み」で心が一杯になり、希望や喜びが取り去られてしまう状態になることなのです。金銭や富と同じく、私たちの日常に必要なもの、自分の生活に必要なものを得ることが、生活のすべてになってしまったら、豊かな人生を歩むことが出来なくなってしまうことなのです。
これは、経済的に豊かであろうと貧しかろうと、同じことがあり得ます。豊かであれば富を増やしたり消費したりすることに忙殺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し、貧しければ明日の生活が気がかりで何とか仕事にありついてお金を手に入れること以外は考えられなくなります。豊かでも貧しくても、誰でも、自分が生きることで精一杯になってしまって、モノのやり取りの中でしか自分を位置付けられ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
だから、「思い悩むな」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す。「モノに気を取られていて、もっと大事なものを見失ってはいないか。あなた自身を見失ってはいないか」と。
ルカによる福音書10章に「マルタとマリヤ」の話がありますが、あの場面で、姉のマルタはイエスさまと弟子たちを家にお迎えして、その接待で手一杯になって不平を洩らします。そうしますとイエスさまが彼女に向かって「マルタ、マルタ、あなたは多くのことに思い悩み、心を乱している」(ルカ10:41)と言わ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心の在る処を問題にしているのです。「天に富を積みなさい」と、先に、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したが、今日のところでも同じ視点で言われ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自分の命のことで、自分の体のことで、自分の明日のことで思い悩むな」と言われます。「あなたの命も、体も、明日という時も、神から与えられたものではないか」と。あなたにふさわしく与えられた「命」であり、「体」であり、「時」であるはずです。神さまが強い意思をもって、目的をもって、あなたに与えられている賜物として授けられているものです。それほどまでに大切なものとして与えられている、この「命、体、時」にとって必要なものを神さまがご用意しないはずがない。このまま放っておけば、この「思い悩み、思い煩い」がその「存在」そのものを滅ぼしてしまうまでになる。だから、「何を食べようか、何を飲もうか、何を着ようかと言って、思い悩むな。明日のことまで思い悩むな。」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思い悩む私たちの願い、祈りを拒んで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
母マリアもまた、人の常識ではまったく理解できないイエスさまのふるまいに、思い悩んだのです。しかし、聖書は「マリアはこれらの出来事をすべて心に納めて、思い巡らした。」(ルカ2:19)と書かれています。マリアは分かるまで、心の奥底に納めていたというのです。
マリアは思い巡らしてはいましたが、思い悩んではいないのです。この違いはいったい何でしょうか。
私たちはこう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思い込み、何かを自分が定めたところから始めます。そこから大きく乖離している現実の姿に耐えかねて落ち込んでしまいます。そこには、隠れた人の傲慢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神さまに任せるべきことを自分の苦労と背負ってしまいます。自分がなりたいと思ってもなれないし、したいと思ってもできない。これが「思い悩み、思い煩い」の姿でしょう。
これは、まさに全地全能の神さまに対する不信と言えます。自分の考え、想定、理解に執着して、神さまの御心、神さまのご配慮に信頼しきれていない私たちの姿です。
そこで、イエスさまは「目に見えない天の父が、空の鳥、野の花を養っておられるのをよく見なさい」と言われます。日々新たに、蓄えておくことのできない今日の恵みを感謝して受け取っているではないか。人が造り上げるものでは装うことのできない姿に配慮してくださっているではないか。それなのに、あなたたちは更に、明日の安心のためになぜ貪欲に求めるのか。あなたがたの目はどうして神さまの御業を見ようとしないのか。
愚かな計算を棄てて、思いをはるかに越えた神さまの知恵に委ねなさい。そうすれば、すべてを知っておられる神さまの御心に気づくだろう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命、体、時」は、私たちの所有物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に仕えるために託されたものです。自分のために蓄えておくことのできないものなのです。33節に「何よりもまず、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33節)とあります。神の国と神の義を実現するために今も神さまは働いておられます。その神さまの御業に自分自身を委ねること。その中で、私たちは見失っていた自分を取り戻すのです。神の国は、モノの支配から私たちを解き放つ神の力です。それは、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贖われた命が新しく生きる場所です。ただ無味乾燥な時間がだらだら続くだけの人生は終わって、神さまが生きて働くこの世界に私たちの進む道が備えられます。
キリストによって天の父のもとへ戻って来た信仰者の生き様は、空の鳥のように、野の草のように自由で、明日の心配を希望に変えていただいて、その日の命を精一杯生きる者となるはずです。
私は仕事柄、思い悩む方の相談を受けることがよくあります。ああしても駄目、こうしても駄目。八方塞がり。だいたい、自分で何とか出来ると思えば、牧師の所に相談になんて来ませんから、相談を受ける時の状況というのは、本当にどうしようもない、だだただ困り果ててしまうようなものばかりです。私は、法律の専門家でもないし、福祉の専門家でもありません。医者でもありません。そういう問題であるならば、専門家の所に一緒に行きましょ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意味では、相談し甲斐のない者です。ただ、私がいつもお話しを聞きながら思っていることは、八方塞がりであっても、一方は決して塞が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右にも左にも行けない。前にも後ろにも行けない。どうすれば良いのか分からない。たとえ、そのような状況であったとしても、一方は必ず開いているのです。その一方とは、上です。天です。天の父なる神さまに向かっては、いつも開かれている。私たちはどんな状況の中でもそこに向かって祈ることが出来るし、そこから神さまが全能の力をもって道を拓いてくださるのです。この、いつも開かれている一方、天に目を上げる。そこから、必ず新しい道が拓かれていきます。私はそのことを信じています。
私たちの人生には様々なことが起こります。「こうなったら良いのに。こうなれば大丈夫」という思いや願いがあっても、なかなかそうなることはありません。しかし、それで良いのです。いや、それが良いのです。私たちは、目的地に向かってまっすぐに進みたくても、途中、山があったり川があったりして、回り道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も、その曲がりくねった歩みの中でこそ、神さまは私たちに必要な出会いを与えてくださり、天を見上げることを学ばせてくださり、本当の目的地を教えてくださるのです。
私共の本当の目的地。それは天の国、神の国です。私たちは、そこに向かって、一日一日歩んでいるのです。その歩みの中で私たちは、エジプトを脱出したイスラエルの民が、40年の荒野の旅において、天からの食糧であるマナをもって養っていただいたように、神さまの養いの中に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知らされ続けていくのです。
私たちは、この歩みへと招かれています。この招きに応えて、共に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4년 10월 27일 주일예배(요약판)】
“정말 배려할 일”
마태복음 6장 19~24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까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실까요?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것저것 걱정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것들을 해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럴 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염려”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서 소망이나 기쁨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금전이나 보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것,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어 버리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가난하든 관계없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유하면 재물을 늘리거나 소비하는 것에 몰두하게 되고, 가난하면 내일의 생활이 걱정되어 어떻게 해서라도 일자리를 얻고 돈을 구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든 여유가 없이 근근이 살아가게 된다면 물건을 주고받는 것에서 밖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물건에 정신이 팔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라고요.
누가복음 10장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장면에서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모셨을 때, 접대하느라 힘이 벅차서 불평을 쏟아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향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루카 10:41) 있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대해서 문제를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늘 말씀도 같은 시각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자신의 내일의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생명도, 몸도, 내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냐”고. 여러분에게 걸맞게 주어진 “생명”이고, “몸”이고, “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하사하신 선물로서 받으신 것들입니다. 그 정도로 소중한 것으로 주어진, 여러분의 “생명과 몸과 시간”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 “염려나 근심”이 “존재” 그 자체를 멸망시켜 버릴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까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우리의 소원, 기도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새기어 생각하니라”(누가 2:19)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될 때까지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염려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뭔가 내가 정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크게 괴리되어 있는 현실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실의에 빠지고 맙니다. 거기에는 숨은 사람의 오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을 자신의 업보로 받아들이고 짊어지려 합니다. 내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바로 이것이 “염려, 근심”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 상정, 이해에 집착해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배려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을 기르고 계신 것을 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모아둘 수 없는 오늘의 은혜를 감사하게 받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치장할 수 없는 모습을 배려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데도 너희들은 한 술 더 떠 내일의 안심을 위해 왜 탐욕스럽게 요구하는 것이냐? 너희들의 눈은 왜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이냐?
어리석은 계산을 버리고, 너희의 생각을 훨씬 넘어선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라. 그러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 몸, 시간”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맡겨진 것들입니다. 자신을 위해 저장해 둘 수 없는 것들입니다. 33절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에 자기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런 가운데에서 여러분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물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속죄 받은 생명이 새롭게 사는 곳입니다. 그저 무미건조한 시간을 질질 이어가는 삶은 끝이 나고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우리가 나아갈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신앙인의 삶은 하늘의 새처럼, 들풀처럼 자유롭고, 내일의 염려를 소망으로 바꾸어 주고, 그날의 생명을 힘껏 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저는 직업상 고민하는 분들의 상담을 받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대게 스스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목사에게 상담하러 오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담 받을 때의 상황이라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고 난감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법률 전문가도 아니고 복지 전문가도 아닙니다. 의사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들이라면 전문가에게 함께 상담하러 가자고 했겠죠. 그런 의미에서 상담자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제가 항상 그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팔방이 다 막혀 있어도 꼭 어느 한 쪽만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죠. 설령 이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한 쪽만은 반드시 열려 있습니다. 그 한 쪽은 바로 위입니다. 하늘입니다.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곳을 향해 기도할 수 있고,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힘으로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항상 열려 있는 이 한편, 하늘로 눈을 돌립시다. 거기서부터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되면 괜찮다”는 생각이나 소원이 있어도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니, 그게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가고 싶어도 중간에 산이 있고 강이 있고 해서 돌아서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구불구불한 발걸음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남을 주시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배우게 해 주시고 진정한 목적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진짜 목적지, 그것은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발걸음 가운데에서 우리는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황야의 여행에서 하늘의 식량인 만나를 가지고 살아남은 것처럼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발걸음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함께 걸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