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1月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4年11月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4章 6~7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8 (イザヤ40章[1])
〇讃 頌 讃頌歌 52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7章 1~6節
〇説 教 「“灰色”を生きる」
(“잿빛”을 산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1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灰色”を生きる」 マタイによる福音書 7章 1~6節
日本の神学者に藤木正三という人がいます。日本基督教団の牧師でありますが、藤木牧師は「断想 ―神の風景―」という著書の中で、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誠実、無欲、色でいえば真っ白な人、不実、貪欲、色でいえば真黒な人、そんな人はいずれも現実にはいません。いるのは、そのどちらでもない灰色の人でありましょう。比較的白っぽい灰色から、比較的黒っぽいのまでさまざまでありますが、とにかく人間は、灰色において一色であります。その色分けは一人の人間においても一定ではなく、白と黒の間をゆれ動いているのであり、白といい、黒といっても、ゆれ動いている者同志の分別に過ぎません。よくみればやはりお互いに灰色であります。灰色は、明るくはありませんが暖かい色です。人生の色というべきでありましょう。」
この藤木牧師任の言葉は、現実の人間の姿をよく表しています。白でもない黒でもない私たち。悪人ではないけれども、善人とも言えない私たち。悪人と善人の間を私たちは揺れ動いている。そのように、誰もが私たちのうちに黒い部分、罪があるわけですが、人の黒い部分が赦せないのです。それが3節の「あなたがたは、兄弟の目にあるおが屑は見えるのに、なぜ自分の目の中にある丸太に気づかないのか」(3節)ということです。
「人を裁くな」という時、その人のすべてを寛容に受け入れて赦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捉えがちですが、そうではありません。間違いは間違いであると指摘することまで禁止し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愛をもってその人を正すべきでしょう。
しかし、問題はその判断をなす私たち自身が灰色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社会常識や規則、何らかの価値観をもって人を判断しています。時にはそこに、先入観や偏見が入り込んで、人を判断する基準となり、私たちは相手を非難したり、批判したり、決めつけたり、否定したりします。それが「裁く」ということです。そういう「裁き」が教会や信仰生活にも入り込んできて、「あの人の信仰はだめだ」などと、言うこともあるでしょう。
そのような裁きをしてしまうのは、灰色の私たちですから、仕方ないのかもしれません。でも、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る生き方を望むのであれば、私たちはちょっと立ち止まって、考える必要があります。
なぜなら、「あなたがたも裁か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とイエスさまが言われるからです。これは、人から裁かれないように、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に裁か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人を裁いたがゆえに神さまに裁かれた人のたとえ話があります。マタイ福音書18章にある「仲間を赦さない家来」のたとえです。王様が家来たちに貸したお金の決済を始めた、とイエスさまは語り始めます。王様から1万タラントンという莫大な借金をしていた家来が連れて来られました。家来は「どうか待ってください。きっとお返しします」と哀願します。一生働いても返せる目途など全く立たない現実に、王様は何と借金を帳消しにします。赦された家来は城を出ました。すると、街で自分が100デナリオンを貸していた仲間に出会います。そこで家来は「貸した金をすぐに返せ」と迫ります。100デナリオンは決して少ない金額ではありませんが、1万タラントンと比べれば60万分の1に過ぎない貸しでした。けれども、家来は仲間を裁き、牢屋に入れてしまいます。他の家来たちはその様子を見て心を痛め、事の次第を王様に告げます。それを聞いた王様は、その家来を再び呼び出して、「わたしがお前を憐れんでやったように、お前も自分の仲間を憐れんでやるべきではなかったか」と怒り、この家来が仲間にしたように彼を牢屋に入れるのです。
私たちが人を裁くとき、同じ秤で、私たちは神さまに裁かれます。天国の扉の前で、神の座の前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それにしても、この家来はなぜ、仲間を牢屋にい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目に丸太があったからです。「兄弟の目にあるおが屑は見えるのに」とありますが、そもそも自分の目は丸太で塞がれていますので、本当は兄弟の目にあるおが屑なんて見えていないのです。それは自分の勝手な判断なのです。
先の伝道集会の時、金迅野牧師任が、聖書講演の中で、ヘイトについてお話してくださいましたが、ヘイトをする人々はヘイトをされる人々のことなんて見ていないと言われました。それは相手のことを見るとヘイトをする確信が揺らぐからだと言われました。自分がヘイトをする人々のことを、人として見て、その人のことを知ったならば、簡単に「死ね」なんて言えないでしょう。ヘイトをする人々は、特別に悪い人だと言うのではなく、相手のことを何も知らず、間違った情報、先入観だけで、相手を裁く。その人はそこにいてはいけない存在、人としてではなく排除すべきものであると考える。それがヘイトの真相だと語ってくださいました。
また、ヘイトをされる側の人間もいつでもヘイトをする側の人間に変わり得ると言われました。憎しみだけで、ヘイトをする人間を見るならば、憎しみという丸太でヘイトする人たちが見え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それが灰色の人間、私たちであるわけです。勿論、「ヘイト」は決して赦してはいけないことです。でも、私たちが自分の目の丸太に気がつかず、相手の人のことが見えていない中で、裁くというのは、それはヘイトと変わらないのです。
川崎市でヘイトされる側、在日同胞たちの抗議集会の中で、あるアジュモニがヘイトする側の人たちに向かって「一緒にご飯を食べようよ」と訴えかけていた、と涙ながらに語ってくださいましたけど。「一緒にご飯を食べながら、お互い、もっと知り合おうよ」ということですね。まさしくそれこそ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る生き方です。
それでは、本当の意味で目が見えているとは、どう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の山上の説教の中で繰り返し言われてきたことですが、愚かで罪深い私たちすべてが大いなる神さまの愛の御手に抱かれていることをしっかりと見つめることです。その神さまの愛にすべてを委ねることです。
人を裁くとは、裁く目で人を見ることです。人を罪人だと決めつける。それはまさに人を罪人として批判し、断罪するような目で見ることで、実は自分を誇ることです。そういう目で見ているから、相手が罪人に見えてくるのです。それとは逆に、この私たちが神さまによって愛され、罪赦された者として、罪を赦し、寛容な、情け深い目で互いを見つめることです。「赦します」と口では言いながら、目は赦していない、そう言うことがあります。本当に相手を赦す時、相手を見るわたしたちの目は、厳しい断罪する目から、相手を受け入れる、柔らかなまなざしへと変わっていくのです。
先ほど、ご紹介しました藤木牧師任は、このようにも言っています。「人の心を土足でふみにじるなと、と言われます。確かに、思いやりのない表面的な批判は、お互い慎まねばなりません。しかし、もしそういう批判を受けたなら、それに抗議するよりは、それはそれとして聞いて、自分を顧みる機会とするのが良いと思います。土足をなじることが、逆に相手を土足でふみにじることになる場合もありますし、自己弁護になることだってあるのです。それに、土足ででも介入されない限り、なかなか目覚めないのが、お互いではありませんか。それはそれとして聞く、それが人間の成熟というものであります。」
「お互い」という言葉が繰り返されています。そうお互い様なのです。それが「灰色を生きる」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は、人の罪など一切問題にするな、どんなことでも赦せ、と言っておられ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地上を生きる私たちの歩みには、やはり問題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罪があり、正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あります。しかしそれを、人の粗探しをして断罪するようなことによって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赦しの恵み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者として互いを見つめつつ、互いに諭し合い、互いに悔い改めながら、互いに赦し合いながら歩んでいくことを、イエスさまは求めておられるのです。
そのためには、私たちの目を繰り返し塞いでしまう丸太を、イエスさまが取り除いてくださり、本当に見え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ことを、いつも祈り求めて行きましょう。
【2024년 11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 “잿빛”을 산다 〉 마태복음 7장 1~6절
일본의 신학자 중에 후지키 쇼조(藤木正三)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기독교단의 목사님입니다만, 이 분은 “단상 -하나님의 풍경-”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실, 무욕, 색깔로 말하면 새하얀 사람, 그것과는 반대인 불성실, 탐욕, 색깔로 말하면 새까만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은 모두 현실에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 어느 쪽도 아닌 잿빛 사람일 것입니다. 비교적 순백에 가까운 회색 잿빛부터 비교적 거무스름한 것까지 다양하기에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잿빛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나 대동소이합니다. 색으로 구분한다면 한 사람의 인간에게도 일정하지 않고, 백색과 흑색 사이를 넘나들기에 하얀 색이라고 해도 또 검은색이라고 해도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분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역시 서로 다들 잿빛입니다. 잿빛은 밝지는 않지만 따뜻한 색입니다. 역시 우리 인생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후지키 목사님의 말은 현실의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얀색도 아닌 검은색도 아닌 우리, 악인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선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우리들, 악인과 선인 사이를 우리는 늘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누구나 우리 안에도 검은 부분의 죄가 있는데 우리는 타인의 검은 부분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3절의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절) 라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할 때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수를 실수라고 지적하는 것까지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그 사람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판단을 하는 우리 자신이 잿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상식이나 규칙,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거기에 선입견이나 편견이 끼어들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결정하거나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판”이 교회나 신앙생활에도 파고들어, “저 사람의 신앙은 안 된다”고 말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비판을 해 버리는 것은 잿빛 우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원한다면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의 심판을 받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심판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심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받은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종들에게 빌려준 돈의 결산을 시작했다고 예수님께서 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임금님으로부터 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던 종이 나왔습니다. 종은 “제발 기다려 주옵소서. 꼭 갚겠나이다” 라고 애원합니다.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임금님은 무려 그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용서받은 종은 성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거리에서 자신이 백 데나리온을 빌려주었던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종은 그에게 “내가 빌려준 돈을 당장 갚아라” 라고 재촉합니다. 백 데나리온은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조금 전 탕감 받은 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겨우 60만분의 1에 불과한 액수입니다. 하지만 종은 동료를 심판하고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다른 종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일의 경위를 임금님께 고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님은 그 종을 다시 불러내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나는 너의 빚을 전부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화를 내며 이 종이 동료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우리가 사람을 심판할 때 같은 헤아림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천국의 문 앞에서 하나님의 자리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 종은 왜 동료를 감옥에 넣었을까요? 그것은 눈 속에 들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원래 자신의 눈은 티로 막혀 있기 때문에 사실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제멋대로인 판단입니다.
지난 전도집회 때 김신야 목사님께서 성경 강연 중에 헤이트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헤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헤이트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보면 헤이트를 하는 확신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헤이트를 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을 알았다면 쉽게 “죽어라”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헤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잘못된 정보, 선입견만으로 상대방을 심판합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배제해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헤이트의 진상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헤이트를 당하는 쪽의 인간도 언제라도 헤이트를 하는 쪽의 인간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미움만으로 헤이트를 하는 인간을 본다면 미움이라는 들보로 헤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맙니다. 그것이 잿빛 인간, 바로 우리인 셈입니다. 물론 “헤이트”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신의 눈 속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심판을 한다는 것 역시 헤이트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와사키시에서 헤이트를 당하는 쪽, 재일동포들의 항의 집회 중에 헤이트하는 쪽의 사람들을 향해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우리 같이 밥 먹어요”라고 호소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목사님께서 울먹이며 말씀해 주셨는데요. “같이 밥을 먹으면서 서로 더 많이 알아가자”는 거죠. 바로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인 셈입니다.
그럼 진정한 의미에서 눈이 보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산상 수훈 속에서 반복적으로 말해 온 것이지만, 어리석고 죄 많은 우리 모두가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안겨 있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은 심판하는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지어 버립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죄인으로 비판하고 단죄하는 듯한 눈으로 보는 것이고, 실은 그것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죄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이런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 죄를 용서하며 관용적이고 인정 많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용서합니다” 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눈은 용서하지 않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로 상대를 용서할 때, 상대를 보는 우리의 눈은 엄한 단죄하는 눈에서 상대를 받아들이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해갑니다.
방금 소개한 후지키 목사님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흙 묻은 신발로 짓밟지 말라고 합니다. 확실히 배려 없는 표면적인 비판은 서로 삼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비판을 받았다면 그것에 항의하기보다는 그것은 그것으로서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토족을 힐책하는 것이 반대로 상대를 토족으로 짓밟게 되는 경우도 있고, 자기 변호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다가 토족으로라도 개입되지 않는 한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것이 피차일반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그것으로서 듣는 것, 그것이 인간의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서로”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피차일반인 것입니다. 그게 “잿빛을 산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일절 문제 삼지 말라, 어떤 일이든 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의 행보에는 역시 문제 삼아야 할 죄가 있고, 바로잡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의 흠을 찾아 단죄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용서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자로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서로 타이르고 서로 회개하면서 서로 용서하면서 걸어갈 것을 예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반복적으로 막아버리는 들보를 예수님께서 제거해 주시고 진정으로 보이게 해 주시기를 항상 기도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