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1月1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録画途中、機材トラブルのため録画停止されました。
一分後に再録画(韓国語説教の後半)したものが次の映像です。
2024年11月1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エフェソ(에베소서) 3章 20~21節
〇讃 頌 讃頌歌 36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0 (イザヤ42章)
〇讃 頌 讃頌歌 52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7章 7~12節
〇説 教 「神の恵みに生きる
(하나님의 은총에 산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0
〇奉献祈祷
〇献 金 特別讃美 車景訓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1月 1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恵みに生きる」マタイによる福音書 7章 7~12節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る。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る。門を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る。」(7節)
有名な御言葉です。ただ、この御言葉だけ聞きますと、頑張って探し求めるならば、道は必ず開かれるという風に聞こえるかも知れません。ややもすると、自分の努力次第でとか、祈り求めれば何でも叶うと理解するかも知れません。
しかし、この御言葉は、先週の「人を裁くな」ということもそうですが、これまでイエスさまがお語りになってきた「敵を愛しなさい」「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なさい」という信仰者の生き方、救いに至る道を教えている延長線上で語られている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人間の身勝手な願いを追い求める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神の国と神の義を求める信仰者の姿勢を問題にし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神さまの御言葉を聞いて、そうだと思い、一旦は御言葉に従おうとします。でも、実際にやってみると、自分には出来そうもないと思ってしまいます。やっぱり自分には出来ない。信仰が弱いから仕方がないと諦めてしまう。イエスさまは私たちに途方もない要求をしているとさえ思ってしまいます。
イエスさまはそんな私たちのことをよくご存じでした。だからこそ、イエスさまは「求めなさい。探しなさい。門をたたき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うすれば与えられる。見つかる。開かれる」と約束して下さっているの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11章を見ますと、今日の御言葉と同じような内容が記されています。ルカによる福音書では「祈るときには」と小見出しが付いているように、祈りの姿勢が問題となっています。イエスさまはそこで「友人にパンを求める」譬えを話されます。旅行中の友達が尋ねて来たのだけれども、出してあげるパンの蓄えがない。それで、近所の友人のところへパンを分けてもらいに行くのだけれども、もう夜遅いからということで門を開けてもらえない。けれども、しつこく頼めば、友人だからというのではなくて、うるさいから何でも分けてくれるだろう。まして神さまは、求めるもの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る。だから、求めなさい、と。
この話は、譬えとして意味するところは分かりますが、現実的に考えれば、全く迷惑な話です。でも、私たちは信仰というものを、誰にも迷惑をかけず、スマートで、優等生の信仰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ているところがあります。でも、私たち在日大韓基督教会の信仰観というのは、もっと泥臭いと言いますか、神の国実現のために、粘り強く求め、探し、門を叩いて来た信仰を持っています。
1970年以降、在日大韓基督教会は、在日コリアンの人権獲得運動に関わってきました。それは単に人権獲得運動というものではなく、福音宣教の業として、イエスさまに倣って、生きる命を奪われた人たちに主イエスの福音を語り、共に生きるために携わって来たものです。それは決して楽な道のり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真っ暗で、どこに門があるのかも分かりません。門を見つけ、必死に門を叩いても誰も開けてはくれません。それでも、求め、探し、門を叩き続けた結果、それまで決して開かなかった門が少しずつ開かれて行ったのです。
そこには絶え間ない信仰の祈りが献げられたでしょう。なぜ、この祈りが献げ続けられたのかと言いますと、9節「あなたがたのだれが、パンを欲しがる自分の子供に、石を与えるだろうか。魚を欲しがるのに、蛇を与えるだろうか。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りながらも、自分の子供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まして、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求める者に良いものをくださるにちがいない」(9-11節)と、この子どもが親を信頼し求めるように、父なる神さまを信じ、祈り求めたからです。エフェソの信徒へ手紙3章にもありますように、神さまは「わたしたちが求めたり、思ったりすることすべてを、はるかに超えてかなえることのおできになる方」です。たとえ願いどおりにならなくても、確かに私たちにとって最善のものを、神さまは用意していてくださいます。
山上の説教の要点はここにあると言ってよいでしょう。天の父をどこまでも信頼すること。そのお方が私たちにとってどこまでも良いお方であることを信じること。すべてはそこにかかっています。
「求めなさい」と言われるのは、そこに与えようと待っている父がおられるからです。「探しなさい」と言われるのは、天に宝を蓄えておられる父がいるからです。確かに私たちには、そういうものを求めない、探さない、戸を叩こうとしない鈍さがあります。それで、どんなに高い理想を言葉で示されても、夢だ幻だといって、いわゆる「現実」の無力感の中から動けません。
けれども、天の父は決して黙っているお方ではありません。イザヤ書の中には「母なる神さま」も出て来ます。イザヤ書49章15節にこうあります。「女が自分の乳飲み子を忘れるであろうか。母親が自分の産んだ子を憐れまないであろうか。たとえ、女たちが忘れようとも、わたしがあなたを忘れることは決してない。」(イザヤ49:15)
「門をたたきなさい」とありますが、私たちは自分が熱心に戸をたたくばかりを考えますが、神さまが尋ねてこられるということも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ヨハネの黙示録3章20節にこうあります。「見よ、わたしは戸口に立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か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者があれば、わたしは中に入ってその者と共に食事をし、彼もまた、わたしと共に食事をするであろう。」(黙3:20)
私たちが求めたり、探したりするのに先立って、神さまが失われた私たちを求めておられるのです。失われた子羊を探して、善き羊飼いである主イエスさまが私たちを尋ねて来られるのです。天の父なる神さまとの絆が回復されるのです。
「だから」と12節が続きます。「だから、人にしてもらいたいと思うことは何でも、あなたがたも人にしなさい。これこそ律法と預言者である。」(12節)
神さまとの絆が回復された者として、私たちは生かされています。神さまによって新たに生かされた者として「人にしてもらいたいと思うことは何でも、人にし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それが神の国と神の義の実現を近づけるのです。
「人に迷惑をかけてはいけません」とか「自分が嫌なことを人にしてはいけません」とかは、よく言われます。でも、イエスさまは「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ような発想から「しなさい」という能動形の発想に変えられました。自分の中にある否定的な思いから、まず、自分が何をして欲しいのか、自分の心の願いに気づくことを勧めています。つまり、イエスさまの教えは、私たちの心の中にある願いを解放し、命の輝きを取り戻させようとしておられるのです。そのために、父なる神さまに「求めなさい。探しなさい。門をたたきなさい」と、私たちの変化を期待しておられます。
私たちが求め、探し、門を叩くのは、自分の願望を叶えるためではありません。その基準は、神さまの御旨の中にあります。それこそ律法と預言者が現していたことです。
私たちは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と復活を信じて、その恵みに生かされて、何でも天の父に求め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す。何をどう求めたらよいのか、私たちの生活の中では様々です。いつも御旨を問いながらの選択をする他はありません。しかし、たとえそこで私の選択が間違ったとしても、天の父に祈り願いながら示された道には、「良いもの」が期待できるのです。
【2024년 11월 10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은총에 산다” 마태복음 7장 7~12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다만 이 말씀만 들으면 열심히 찾고 구하면 길은 반드시 열린다는 식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자칫하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라든가, 기도하면서 구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이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난 주의 “비판하지 말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신앙인의 삶,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의 이기적인 소원을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줄 알고 일단은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해 보면 자신은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역시 자신은 할 수 없다, 믿음이 약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요구를 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얻을 것이라, 찾아낼 거이라, 열릴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오늘의 성경말씀과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기도할 때에는”이라고 소제목이 붙어 있듯이 기도의 자세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친구에게 떡을 구한다”는 비유를 하십니다. 여행 중인 친구가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서 밤중에 친구에게 떡을 나눠 받으러 가는데, 이미 밤이 늦었다고 해서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끈질기게 계속 부탁하면 친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끄러우니까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나누어 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구하라고요.
이 이야기는 비유로서 의미하는 바는 알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성가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스마트하며 우등생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신앙관이라는 것은 더 진흙탕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해 끈질기게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 온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 이후 재일 대한기독교회는 재일동포들의 인권 획득 운동에 관여해 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권획득운동이 아니라 복음선교의 업으로 예수님을 본따 삶의 생명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함께 살기 위해 해온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편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깜깜해서 어디에 문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문을 찾고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다 보니 그때까지 결코 열리지 않았던 문들이 조금씩 열려 갔습니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신앙의 기도가 올려졌을 것입니다. 왜 이 기도가 계속 올려졌는가 하면, 9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9-11절) 라고 이 아들이 부모를 신뢰하고 구하도록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도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십니다. 비록 소원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서는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요점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는 것. 그분이 우리에게 어디까지나 좋은 분임을 믿는 것.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 주려고 기다리는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저장하시는 아버지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구하지 않고 찾지도 않고 문을 두드리려 하지 않는 둔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높은 이상을 말로 나타내도 꿈이다 환상이라고 해서 소위 “현실”의 무력감 속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결코 입을 다물고 있을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중에는 “어머니이신 하나님”도 나옵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
“문을 두드리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기가 열심히 문을 두드리는 것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우리가 구하거나 찾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우리를 구하여 찾으십니다.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아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유대감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고 12절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
하나님과의 유대가 회복된 자로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자로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가까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거나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발상에서 “하라”는 능동형 발상으로 바꾸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먼저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내 마음의 바람을 깨닫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해방시키고 생명의 빛을 되찾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며 우리의 변화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율법과 선지자가 드러내고 있던 일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 은혜에 힘입어 무엇이든 하늘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하면 좋을지 우리 생활 속에서는 다양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거기서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며 나타난 길에는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