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1月17日主日礼拝 式順・説教
2024年11月1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에베소서) 10章 9節
〇讃 頌 讃頌歌 3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1 (イザヤ55章)
〇讃 頌 讃頌歌 56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7章 13~14節
〇説 教 「命に通じる狭い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7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1月 1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命に通じる狭い門」マタイによる福音書 7章 7~12節
イエスさまは「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と言われます。でも、「狭い門」と聞きますと、そこは安易に入ることのできない門のように思います。しかし、決してそうではありません。
イエスさまが言われる「門から入る」というのは、「入門する」という意味です。「入門する」とは、ある人の「弟子」になることですね。ある教師、指導者の弟子となりたい者は、その人の家の門を叩くわけですが、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家を持たず、野外で人々に教えておりました。それで、イエスさまの弟子となりたいと思う者は、イエスさまが来られる場所に出掛けて、弟子となり、イエスさまが行かれるところ、どこにでもついて行きました。イエスさまが「山上の説教」をなさった時も、野原の石の上に腰を下ろしたイエスさまのもとに弟子たちが集まってきました。そこには実際の門はありません。誰でもイエスさまに近づくことができました。イエスさまのもとに行く門は、「狭い門」どころか、広く開放された門で、誰でも、イエスさまに「入門」す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は、だれでも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休ませてあげよう」(マタイ11:28)、「渇いている人はだれで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て飲みなさい。わたしを信じる者は、聖書に書いてあるとおり、その人の内から生きた水が川となって流れ出るようになる」(ヨハネ7:37-38)と言われました。「だれでも」、全ての人が招かれているのです。実際、イエスのもとには「心の貧しい人」、「悲しむ人」、「柔和な人」、「義に飢え渇く人」、「義のために迫害されている人」が集まりました。彼らはイエスさまによって慰められ、満たされ、強められました。「あわれみ深い人」、「心のきよい人」、「平和を実現する人」へと変えられていきました。
イエスさまの門は、全ての人々に開かれた「広い門」だったのです。それなのに、なぜ、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門を「狭い門」と言わ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人々の目から見れば」、または「人間的な判断によれば」、狭い門にしか見えなかったからです。
イエスさまの名が知れ渡り、イエスさまの教えをまことに多くの人が聞きに集まってきました。しかし、それは、貧しい開拓地ガリラヤでの出来事に過ぎませんでした。エルサレムには祭司長たちがいて、神殿を支配していました。ユダヤの律法学者や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は、長い歴史の中で築きあげられてきた宗教の伝統を誇っていました。民衆も、ファリサイ派の人々や律法学者たちが教えることに矛盾があり、無意味なものだとしても、多くの人がその教えを守り続けていました。なぜなら、「昔から」、「大勢の人が」守ってきた教えに従うほうが、イエスさまの教えに従うよりはずっと楽で、仲間はずれにならなくて済んだからです。
何も考えないで他の人がするようにしていればそれで良いのです。考えたり、決心したり、生活を改めなくて済むわけですから、確かにそれは楽な道です。
ですから、人々の目に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や律法学者たちの教えは「広い門」に見え、そこから続く道も、「広い道」だと思われていたのです。しかし、そこには命が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滅びに通じる門は広く、その道も広々として、そこから入る者が多い」と言って、その広い門も、広い道も「滅びに通じる」ものだと言わ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は、「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は、だれでも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渇いている人はだれで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て飲みなさい」と言って、あらゆる人を招かれましたが、それとともに、「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マタイ16:24)とも言われました。そう言われた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刑場に向かわれ、そこで命を献げられました。イエスさまがよみがえり、天に帰り、聖霊が人々に降って、福音がローマ帝国内に広がると、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はたちまち迫害を受けました。主イエスを信じる多くの人が実際に十字架を背負って歩かされたのです。
「十字架を背負う」などと言われますと、イエスさまの教えがたちまち「狭い門」、「細い道」のように感じてしまいます。けれども、それは、「十字架を背負う」ことの意味を正しく理解していないからです。「十字架を背負う」とは、苦しみや痛みを耐え忍ぶことではありません。また、「十字架」とは、多くの人が考えているような、病気や、貧困など、自分に課せられた苦しみのことでもありません。
イエスさまが「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と言われたように、「十字架を背負う」ことと、「自分を捨てる」こととは一つです。十字架は処刑の手段で、それは「死」を意味しますか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う」とは、自分を十字架で死なせるという意味です。もちろん、これは本当に死んでしま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が言われた「自分の十字架を背負う」という、この「自分」とは、罪の性質を持つ古い自分のことです。まるで、自分ひとりの力で生きているかのように考え、世界が自分を中心に回っているように行動してしまう「自分」のことです。その「自分」を捨て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は、キリストによって変えられ、新しい命を受けています。日々、古いものが死に、新しい自分に生きる、それが「十字架を背負う」ことです。
十字架を負って歩む道は、新しい命に生かされる、「命に通じる」道です。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あとに復活がありました。復活のあとに昇天がありました。昇天のあとに聖霊の降臨がありました。十字架を負ってイエスさまに従う者は、主イエスの復活の命を受けます。イエスが栄光のうちに天に上げられた、その栄光に与ります。イエスさまが「あなたがたの上に聖霊が降ると、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る」(使1:8)と言われたように、十字架の道は力を受ける道なのです。
イエスさまを信じない人々が歩む道は、広い道に見えても、実際は、周りの人々の顔色を伺いながら歩む窮屈な道です。そこには命がなく光もありません。しかし、イエスさまに従って歩む道は細い道に見えても、それは「命に通じる」確かな道です。そこには光があって、誰も迷うことなく、確信をもって歩くことができます。私たちがイエスさまに入門したその「門」から続く道は「天の門」に通じる道です。私たちは、希望をもって、天を目指して歩んでいるのです。その道が「細い」といわれているのは、イエスさまを信じない人々の目から見てのことであり、信仰の道は、ほんとうは、広々とした天につながる高速道路なのです。
イエスさま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10章9節でこのように言われています。「わたしは門である。わたしを通って入る者は救われる。その人は、門を出入りして牧草を見つける。」(ヨハネ10:9)
夜が明けると、羊飼いは家畜小屋の扉を開いて、羊を野原に連れて行きます。羊飼いは、草と水のあるところを探して羊を遠くまで連れていくこともあります。家畜小屋に帰れないほど、遠くまで来たときには、羊飼いは、石で囲んだ囲いの中に羊を追いやります。そして、その入り口に座るのです。つまり、羊飼い自身が「門」となるのです。イエスさまが「わたしは門である」と言われたのは、ユダヤの羊飼いが実際にしていたことでした。この「門」から入り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門」とは、イエスさまご自身なのです。イエスさまに身を寄せるなら、イエスさまご自身が「門」となって、信じる者を敵から、災いから守ってくださいます。ここに私たちの平安があります。
またイエスさま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14章6節でこう言われまし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命である。わたしを通らなければ、だれも父のもとに行くことができない。」(ヨハネ14:6)
イエスさまがこの道を歩けと言われた道、それもイエスさまご自身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は、神さまと人との大きな断絶にかけられた道です。イエスは、文字どおり、ご自分のからだを、神さまへの道として十字架で献げてくださいました。
「わたしは門」、「わたしは道」、これ以上に力強い言葉はありません。命に通じる門に入るのも、そこから天に通じる道を歩むのも、自分の頑張りで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キリストによらなければ、イエスさまを信じ、イエスさまに信頼し、イエスさまに従うのでなければ、できないの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ご自分に信頼する者を助け、守り、喜びと感謝と幸いの大通りを歩ませてくださいます。讃頌歌370番に「主にすがるわれに 悩みはなし 十字架のみ許に 荷を下せば 歌いつつ歩まん ハレルヤ ハレルヤ 歌いつつ歩まん この世の旅路を」とあるように、今週も、この信仰の道を歩み続けましょう。
【2024년 11월 17일 주일예배(요약판)】
“생명으로 안도하는 좁은 문” 마태복음 7장 13~14절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라고 들으면 거기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문인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입문한다”는 뜻입니다. 입문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이죠. 어떤 교사, 지도자의 제자가 되고 싶은 자는 그 사람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야외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자는 예수님이 오실 곳에 나가서 제자가 되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 어디든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을 하셨을 때도 들판의 돌 위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로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는 문은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는 문은 좁은 문은 커녕 넓게 개방된 곳이기에 누구나 예수님께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마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고 하셨습니다. “다”, “누구든지”, 모든 사람이 초대받고 있는 거죠. 실제로 예수님 밑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 위로받고, 채워지고, 강해졌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넓은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신의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또는 “인간적인 판단에 따르면”, 좁은 문으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으러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개척지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제사장들이 있어서 성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쌓아온 종교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것에 모순이 있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계속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켜온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하고 있으면 그만인 겁니다. 생각하거나 결심하거나 생활을 고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확실히 그것은 편한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넓은 문”으로 보이고, 거기서 이어지는 길도 “넓은 길”로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고, 그 큰 문도, 넓은 길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라고 말씀하셔서 모든 사람을 초대하셨지만, 그와 함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도 하셨습니다. (마16:24)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하셨고, 그곳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이 사람들에게 내려져 복음이 온 로마 제국 안에 퍼지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세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걷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금세 “좁은 문”, “협소한 길”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통과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기 십자가”란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병이나 빈곤 등, 자신에게 부과된 고통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십자가는 처형의 수단으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정말 죽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이 “자기”는 죄의 성질을 지닌 오래된 자기를 말합니다. 마치 나 혼자의 힘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 버리는 “자기”를 말합니다. 그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바뀌어 새 생명을 받고 있습니다. 날마다 오래된 것이 죽고 새로운 내가 산다, 그것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걷는 길은 새 생명에 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부활 후에 승천이 있었습니다. 승천 뒤에 성령 강림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주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하늘에 올리신 그 영광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사1:8) 라고 말씀하시듯이 십자가의 길은 힘을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걷는 길은 넓은 길로 보여도 실제로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걷는 갑갑한 길입니다. 거기에는 생명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걷는 길은 좁은 길로 보여도 그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확실한 길입니다. 거기에는 빛이 있어서 아무도 헤매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입문한 그 “문”에서 이어지는 길은 “하늘의 문”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길이 “좁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 것이고 신앙의 길은 사실은 드넓은 하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요10:9)
날이 밝으면 양치기는 가축우리의 문을 열고 양을 들판으로 데려갑니다. 양치기는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양을 먼 곳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가축우리에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을 때는 양치기는 돌로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양을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 입구에 앉습니다. 즉 양치기 자신이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문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의 양치기가 실제로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문”이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 몸을 의지한다면 예수님 자신께서 “문”이 되셔서 믿는 자를 적이나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평안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걸으라고 하신 길, 그것도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큰 단절을 이어주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가는 길로 십자가에서 바쳐 주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나는 길이다”, 이보다 더 힘찬 말은 없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 들어가는 것도, 거기서 하늘로 인도하는 길을 걷는 것도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신뢰하는 자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며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큰 길을 걷게 해주십니다. 찬송가 370장의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처럼 이번 주에도 이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