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1月24日 感謝節主日礼拝 式順・説教
2024年11月2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感謝節礼拝〉
〇黙 祷
〇招 詞 ルカ(누가복음) 17章 14~16節, 19節
〇讃 頌 讃頌歌 4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06 (感謝節[2])
〇讃 頌 讃頌歌 42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7章 15~20節
〇説 教 「良い実を結ぶために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〇祈 祷
〇聖 礼 典 聖餐式
〇讃 頌 讃頌歌 590
〇奉献祈祷
〇献 金 特別讃美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1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良い実を結ぶために」マタイによる福音書 7章 15~20節
今日は、感謝節です。主なる神さまからの恵みを一つ一つ思い起こしながら、神さまに感謝を表す日です。そして、この日に与えられた御言葉は、「偽預言者を警戒しなさい」という言葉から始まっています。「偽預言者」とは、今で言いますと、異端とかカルト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感謝節とは、関係のない内容のように思えますが、偽預言者たちの教えに従う人たちには、そこに真の救いがないために、喜びも感謝も生まれてこないのです。
イエスさまは偽預言者なのかどうかを見分けるためには、その実を見なさいと言います。実が「良い実」なのか「悪い実」なのかで、その木が良い木なのか悪い木なのかが分かると言うのです。ということは、木が実を結ぶまで分か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簡単には判別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れほど偽預言者は巧妙だということです。実を見れば分かるのでしょうが、分からないうちに偽預言者たちは誤った教えを人々に植え付けていくのです。だから、「警戒しなさい」とイエスさまは警鐘を鳴らしています。
ところで、信仰者にとっての「実」とは何でしょうか。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5章22~23節には「聖霊の実」の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霊の結ぶ実は、愛であり、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自制です。」(ガラテヤ5:22-23)
この9つの「聖霊の実」は、聖霊がクリスチャンの生活の中におられることの結果です。
聖霊がクリスチャンの生活の中に入ってこられることの第一の目的は、その人の生活を変えることです。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従わせて、もっとイエスさまに似たものにすることが聖霊の業(働き)です。
私たちが結ぶ良い実というのは、まさにこの「聖霊の実」のことかと思います。ただ、聖霊の実を結ぶのを妨げるものがあります。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5章には、「聖霊の業」を妨げる「肉の業」のことが挙げられてます。「肉の業は明らかです。それは、姦淫、わいせつ、好色、偶像礼拝、魔術、敵意、争い、そねみ、怒り、利己心、不和、仲間争い、ねたみ、泥酔、酒宴、その他たぐいものです。」(ガラテヤ5:19-21)
聖霊の実を妨げるものがなんと多いことでしょう。心配になります。本来、罪人の私たちです。肉の業からは逃れられないのです。だからこそ肝心なことは、イエス・キリストと木につながっ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先週、お話した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門を通り、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道を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ルカによる福音書17章に、イエスさまが「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十人の人をいやす」話があります。ガリラヤとサマリアの間にある村に重い皮膚病を患った十人の人がイエスさまを出迎え「どうか、私たちを憐れんで下さい」(ルカ17:13)と訴えました。するとイエスさまは「祭司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体を見せなさい」(ルカ17:14)と言われました。彼らは、イエスさまのところに従い、祭司たちとのところへ行きました。その行く途中で病気が癒やされたのです。しかし、イエスさまのところに戻ってきて感謝を表したのは、たった一人でした。しかもサマリア人であ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清くされたのは十人ではなかったか。ほかの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この外国人のほかに、神を賛美す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いのか」(ルカ17:17-18)と言われています。
イエスさまは、自分の病気が癒されたことを経験した10人全員が、このサマリヤ人のように、神さまを讃美しながら戻って来ることを期待しておられたと思います。そして、彼らに、体の癒し以上に大切な、罪からの赦しと永遠の命を与えたいと思っておられました。しかし、他の9人は、自分の病気が癒されて健康を回復したことだけで満足して、彼らには、主イエスに感謝を表そうという考えが思いつかなかったようです。彼らの病気は、確かに、癒されました。しかし、一人の人間として、病気が癒されるだけでは不十分です。体の癒やし以上に、魂の救いが必要だ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に感謝しに戻ってきたサマリヤ人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こう言われまし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ルカ17:19)
このサマリヤ人は、奇跡的に肉体の病気を癒されただけではなく、罪からの赦しと永遠の命をも与えられたのです。一方、ほかの9人は、自分がほしいと願っていたものを手に入れると、そのことを喜びましたが、その働きを行ったイエスさまに感謝する心がありませんでした。サマリヤ人のように、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して認め、イエスさまに従って生きることをしませんでした。彼らの体は癒されましたが、彼らの罪が赦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のです。
ここには、神さまが行ってくださった恵みの業を経験することに満足する生き方と、その働きを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を救い主、主人として受け入れ、イエスさまのもとに来て、イエスさまに感謝する生き方の二つの生き方があります。イエスさまに感謝する生き方、それが信仰です。感謝のないところに信仰は育たないのです。良い実を結ぶことも出来ません。だからこそ、イエスさまにつながっていることが必要なのです。
説教の後、聖餐式を執り行います。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恵みを覚え、イエスさまの肉であるパンと血であるぶどう酒(ジュース)を分け合います。それはイエスさまとつながっていることを心に刻みつけるためです。
そして、その感謝のしるしとして、その後、献金をささげます。献金は神さまから頂いた恵みの代価として支払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感謝として、信仰のうちに、それは強制されたものではなく、心から献げたいと思って献げるものです。イエスさまを頭とする教会に仕えるために、一つの奉仕の業として献金をするのです。奉仕の業の原動力は感謝です。感謝がなければ奉仕はすぐに重荷になってしまいます。
最後に、笑い話のような実話をお話します。毎年、大量の「神さま宛て」の手紙が、世界各地からエルサレムの郵便局に送られて来るそうです。エルサレム中央郵便局の広報担当者イツァク・ラビヒヤ氏は、こう語っています。「この郵便局では、宛先が神様かイエス・キリスト様となっている手紙を、数10万通も保管しています。どういうわけか、そういう手紙がエルサレムの郵便局に届くのです。」
あるイスラエル人男性が、生活が苦しいのでどうしても5000シェケル(およそ12万円)与えて欲しいという懇願の手紙を、神様宛てに送ってきました。郵便局員たちは、その哀れな内容に心を動かされ、局内で4300シェケルの募金(要求よりは700シェケル不足している額)を集めて、その男に送金しました。ひと月ほどしてから、同じ人物から再び神様宛ての手紙が送られてきました。そこには、こう書かれていました。「神様、援助のお金を送っていただき、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次に送っていただく時は、郵便局経由にしないようにお願いします。局員たちは泥棒です。彼らは、700シェケル盗んだのです。」
感謝の心がないというのは、恐ろしいことです。この人物は、経済的に貧しかっただけでなく、心も貧しかったようです。
この心の貧しい人を責めるつもりはありません。だって、私たちの心もそんなに変わりは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心の貧しい人に対し、イエスさまは「幸いである。天の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なぜなら、イエスさまにつながっていれば、幸いも天の国もあなたのものだと招いておられるからです。
今日のテーマは、「良い実を結ぶために」ということですが、良い実とは何かという議論ではなく、感謝をもってキリストにつながって生きることなのです。あなたはあなたとして、キリストにつながって精一杯生きればいい。そこで神さまは何らかの実を結んでくださると、信じて歩めば良いのです。そこに自然と感謝の心も生まれるのです。
【2024년 11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마태복음 7장 15~20절
오늘은 감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하라”는 경고로 시작됩니다. 거짓 선지자는 오늘날로 치면 이단이나 컬트를 뜻합니다. 얼핏 보면 감사절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구원이 없기에, 기쁨과 감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기 위해 “그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가 좋은 열매인지 나쁜 열매인지에 따라,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나무가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그 본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만큼 교묘하다는 의미이지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열매가 맺히기 전에 이미 거짓 선지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삼가하라(경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열매”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라디아서 5:22-23)
이 9가지의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거하신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는 첫 번째 목적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고,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좋은 열매는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육체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라디아서 5:19-21)
성령의 열매를 방해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걱정될 정도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기에 육체의 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에 있는 한 마을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간청합니다.
“예수 선생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17:13)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가던 중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후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누가복음 17:17-18)
예수님께서는 열 명 모두가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육체의 병 고침 이상의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명은 병이 나아 건강을 되찾은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께 감사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병은 나았지만, 병의 치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가복음 17:19)
이 사마리아 사람은 단순히 육체의 병이 나은 것뿐 아니라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까지 받았습니다. 반면, 다른 아홉 명은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얻은 것만으로 기뻐했지만,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지도,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몸은 치유되었지만, 그들의 죄는 사함 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경험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삶이고, 또 하나는 그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삶, 그것이 신앙입니다. 감사가 없는 곳에서는 신앙이 자랄 수 없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설교 후에는 성찬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또는 주스)를 나눕니다. 이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기 위함입니다.
또한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대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은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행위입니다. 봉사의 원동력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봉사는 곧 짐이 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실화를 하나 나누고자 합니다. 매년 전 세계에서 “하나님 앞으로”라는 편지가 예루살렘 중앙우체국으로 보내져 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중앙우체국 홍보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우체국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님 앞으로 온 수십만 통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편지들이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어느 날, 한 이스라엘 남성이 “생활이 어려우니 5000셰켈(약 12만 원)을 달라”는 간청 편지를 하나님 앞으로 보냈습니다. 우체국 직원들은 그 안타까운 사연에 마음이 움직여 내부에서 4300셰켈(요청 금액보다 700셰켈 부족)을 모아 그 남성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뒤, 그 남성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신 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우체국을 거치지 않게 해주세요. 직원들이 700셰켈을 훔쳐갔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 사람은 경제적으로만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도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복도 천국도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입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가 무엇인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통해 어떤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감사의 마음이 생겨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