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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年12月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4年12月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ルカ(누가복음) 2章 10~12節
〇讃    頌    讃頌歌 2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5 (待降節[1])
〇讃    頌    讃頌歌 48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7章 21~23節
〇説   教    「あなたの信仰はそれで合っていますか?
                 (당신의 믿음은 올바른 길에 있습니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3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2月 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の信仰はそれで合っていますか?」
          マタイによる福音書 7章 21~23節


 21節です。「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天の国に入るわけではない。わたしの天の父の御心を行う者だけが入るのである。」(21節)
 これは、非常に厳しく重たいも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呼びかける人たちとは、すなわちキリスト者です。そのキリスト者の誰もが「天の国」である「神の国」に入るのではない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す。
 「天の国に入る」とは、単に死後の世界の幸いの約束に留まりません。来るべき日の裁きにおいて、今あなたはどのような立ち位置にあるかを問いかけているのです。「天の国」「神の国」に向かう途上にある私たちが、今、どのように生きているのかが問われているのです。


 もう少し説明を付け加えますと、礼拝に忠実に出席し献金をささげることや教会員としての務めを果たすことがキリスト者であることの条件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あるいは、教会に集わなくても聖書を読み、「キリスト者であること」を真面目に考え、キリスト者として相応しい生き方をすることが条件だというわけでもありません。


 22節にあります「預言する」こと、「悪霊を追い出す」こと、「奇跡をいろいろ行う」ことは、すべて「御名によって」とありますから、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の業であっ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これらの信仰の業は教会の活動として大切なことです。いわば、伝道の業です。これらを一生懸命にやってきたのに、イエスさまは「あなたたちのことは全然知らない。不法を働く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去れ」(23節)と言われるというのです。


 そんなのってありますか? 教会に仕え、一生懸命に伝道もしたのに、イエスさまは「否」を突きつけるのです。あなたの頑張りは不十分だから駄目だというのでも、もうちょっと頑張れば大丈夫というのでもないのです。「あなたたちのことは全然知らない」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す。これって、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イエスさまが言われる天の国に入る条件は、「わたしの天の父の御心を行う者」ということです。しかも、イエスさまは「完全さ」を求めておられます。
 ユダヤ教においては、律法という基準があって、サドカイ派の場合は5書(創世記、出エジプト記、レビ記、民数記、申命記)に書かれている律法を遵守することでした。また、ファリサイ派の場合は律法とその解釈を生活に適応しながら守ることが「完全」ということで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がここで求められている「完全さ」とは、そのよう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


 そもそもの発想が違っているのです。「わたしたちは御名によって預言し、御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御名によって奇跡をいろいろ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と自己規定することが、「不法を働く」ということなのです。律法を「守る」から救われるという、「○○すれば」ということを条件づけることにより、結局救いの根拠を人間の側からの努力にすり替えてしまっているからです。私たちの教会においても起こり得ます。「聖書のみ」「恵みのみ」を語りながらも、約束事や規則などをもって、それを救いの条件のように考えがちなので、そこには注意が必要です。


 今日、私たちが心に留めるべき第一は、「わたしの天の父の御心を行う者だけが入るのである」という御言葉です。この「天の父の御心」と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は信仰をもって神さまの御言葉に従うことが「天の父の御心を行う」ことだと理解しています。具体的には、神さまを愛し、隣人を愛するということですが、イエスさまはそれを「完全」に行うようにと求められているのです。でも、私たちはそんなのは無理だ、出来そうにない、と思い、そこで躓くか、じぶんの出来る範囲で頑張ろうとするか、どちらかだと思います。私たちはそこで諦めるのではなく、信仰をもって、御言葉に従おうと努力していたら、聖霊なる神さまが私たちをキリストに似た者に少しずつ変えてくださると信じています。
 しかし、そこには注意が必要なのです。確かに、私たちは信仰的努力が必要です。簡単には神さまの御言葉に従うことは出来ません。でも、「努力したら」「○○すれば」という条件をつければ、天の国が近づくように考えるのは間違っているのです。
 「信じれば救われる」と言います。それは真理です。でも、その「信じ方」が問題になるの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21章に「二人の息子の譬え」があります。イエスさまが神殿に入られて、敵対する祭司長や長老たちとの問答の中で「二人の息子の譬え」を話されました。譬えの内容は、ある人が二人の息子に「子よ、今日、ぶどう園に行って働きなさい」と言ったところ、兄息子は「いやです」と答えますが、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で働きます。でも、弟息子は「お父さん、承知しました」と答えますが、ぶどう園に行きませんでした。この譬えを話された後、イエスさまは「この二人のうち、どちらが父親の望みどおりにしたか」と問います。祭司長や長老たちは「兄の方です」と答えますと、イエスさまは「はっきり言っておく。徴税人や娼婦たちの方が、あなたたちより先に神の国に入るだろう」(マタイ21:31)と言われました。日本語聖書と韓国語聖書では、この兄と弟の行動が逆になっておりますが、それは、原本の違いでそうなっていますので、この場合、兄でも弟でもどちらでも構わないんですが、ここで重要なのは、「後で考え直して」という「悔い改めて」最終的には父親の願い通りに行動するのかどう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祭司長や長老たちも自分たちの行動規範に照らしても、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で働いた方が父の望みどおりにすることだと理解していたわけです。
 でも、イエスさまはその時に「徴税人や娼婦たち」のことを引き合いに出し、彼らの方が先に天の国に入ると言われました。


 そこで、私たちは徴税人や娼婦たちは悔い改めたから天の国に入ることが出来るのだと考えますが、そこでも「○○したから」「○○すれば」ということが出て来ます。
 でも、果たして、徴税人や娼婦たちは悔い改め、それまでの生活を改めたのでしょうか。勿論、悔い改め、マタイにように徴税人の仕事を捨てイエスさまに従った人もいるでしょう。しかし、すべての人がそのように出来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社会が彼らを受け入れません。ですから、悔い改めはしたものの生活は依然と変わらないといった人が多くいたでしょう。生きて行くにはどうしようもないことだってあるわけです。だからこそ、彼らは十分に理解していたのです。こんな自分を救ってくださるのはイエスさまだけだ、と。
 「ことあるごとに、自分の罪深さを感じ、生きる希望さえも見いだせない。でも、イエスさまだけは私に愛の御手を差し伸べようとされる。自分はその愛の手をしっかりと握るしかない。」神さまはこの信仰を求めておられるのだと思います。悔い改めて正しいキリスト者としての生活を行う。そうすれば天の国に入れると言っておられるのではないのです。


 この山上の説教の初めに「八つの幸い」の幸いがありましたが、「心の貧しい人々」(5:3)、「悲しむ人々」(5:4) は幸いであるという、常識とは正反対のことが言われ、「天の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である」との祝福が約束されています。
 まさに、ここに天の父の御心があります。救われるはずのない者に救いを与えるという神さまの御心です。そこに一切の条件を付け加え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救いに条件を付け加えようとする者に対して、神さまは「あなたたちのことは全然知らない」「不法を働く者ども」と徹底的に拒否されるのです。


 御子イエス・キリストは、名もないガリラヤの若い夫婦の元に生まれます。何よりも生まれて飼い葉桶の中に寝かされます。どこにメシアの栄光があるでしょうか。人間の目には分からない事柄です。でも、それが天の父なる神さまの御心でした。救いから最も遠いところに救いをもたらし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
 ユダヤ人にとって救いから遠いと見なされていた羊飼いたちがクリスマスの最初の証言者となったように、私たちも救いへ招かれ、クリスマスの証言者とな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私たちもまた、「イエスさまこそ救い主」と、ただただイエス・キリストに寄りすがりながら「キリストの道」を歩んでいけたらと願います。
 まさにそこに、クリスマスの希望があります。

 


【2024년 12월 1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의 믿음은 올바른 길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7장 21~23절

 

오늘의 본문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이 말씀은 매우 엄중하고 무거운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이들은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사후에 주어지는 복된 약속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 중인 우리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며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22절에서는 “선지자 노릇 한다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이름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행위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며, 전도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교회를 섬기고, 열심히 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거절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너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라거나 “조금 더 노력하면 된다”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요구하십니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경우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기준이었으며,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율법과 그 해석을 일상에 적용하며 준수하는 것을 “완전함”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함”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문제는 우리의 발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예언을 행했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라는 자기 규정(self-definition)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여기는 태도는 결국 구원의 근거를 인간의 노력으로 대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대 교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규칙이나 약속을 구원의 조건처럼 여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첫 번째는 바로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늘에 계신 하늘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완전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면 이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저앉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노력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조금씩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노력하면”, “무언가를 하면” 천국이 가까워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믿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를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향해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에서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형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후에 마음을 바꾸어 순종했고, 동생은 순종한다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나중에 마음을 바꿔 순종한 자가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21:3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했기 때문에”라는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과연 그들이 완전히 회개하고 삶을 바꾸었을까요? 물론, 마태와 같이 세리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는 여전히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뿐이다” 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기대어 주님의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서두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 5:3),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 5:4) 라고 말씀하시며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늘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여기에 어떤 조건도 덧붙일 수 없습니다. 구원의 조건을 덧붙이려는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개서 떠나가라”고 철저히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름 없는 갈릴리의 젊은 부부 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태어나자마자 말 구유에 뉘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구원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구원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구원과는 거리가 멀 것 같던 목자들이 크리스마스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크리스마스의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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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4年12月0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