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2月1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2月1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6編 7~8節
〇讃 頌 讃頌歌 1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3 (詩編 23編)
〇讃 頌 讃頌歌 52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8章 28~34節
〇説 教 「絶新しい生き方へと踏み出すために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6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2月 1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新しい生き方へと踏み出すために」
マタイによる福音書 8章 28~34節
イエスさま一行が異邦人の住む湖の向こう岸に着きますと、二人の悪霊に取り憑かれている人が、イエスさまのもとにやって来ました。彼らはわざわざ墓から出て来て、イエスさまに会いに来たのです。何のため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に「悪霊を追い出して、私たちを救ってください」と願うため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彼らはこう叫んだのです。「神の子、かまわないでくれ。まだ、その時ではないのにここに来て、我々を苦しめるのか。」(29節)
これは、この人たちの叫びと言うよりも、悪霊そのものの叫びです。悪霊が、この人たちの口を通して語っているのです。悪霊に取りつかれた人は、自分の言葉を語ることができなくなり、悪霊の言葉を語ってしまうのです。だから人と言葉が通じなくなり、交わりが失われ、得体の知れない存在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
この二人が墓場に住んでいたのは象徴的なことです。墓場は、生きた人間の居場所ではありません。死んだ者の場所です。つまり彼らは、生きながら死んだ者になってしまっていたのです。それは彼らが、人々と言葉を通じ合わせることができず、交わりを失っているからです。人との交わりを失ってしまう時、私たちは死んでいるのと同じなのです。彼らが墓場に住んでいたのは、そのことを象徴しています。
しかし、そこにはもう一つ、彼らが町から追い出されて墓場に住んでいた、という事情もあるでしょう。すぐに暴力をふるい、話も通じない、得体の知れない存在である彼らは人々から忌み嫌われ、人々の間から追い出されて墓場に住むようになったのです。私たちも、自分と言葉が通じない、分かり合うことができない相手を、交わりから排除してしまうことがあります。悪霊に取りつかれた人たちが墓場に住んでいるというこの状況は、私たちのこの社会の縮図であると言うこともできます。
このことも私たちはしっかりと覚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彼らは自分の本当の気持ち、言葉を発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この人たちの心の中には、「悪霊を追い出して、助けてください」という思いがあるのです。しかし、口から出る言葉は、「俺たちにかまわないでくれ、苦しめないでくれ」という悪態なのです。その悪態を、彼らの本心として受け止めてしまったら、大きな間違いを犯すことになります。イエスさまはそうはなさい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は、この人たちの心の底にある、声にならない、救いを求める叫びを聞き取りつつ、彼らを支配し、その言葉をねじ曲げている悪霊と対決なさったのです。
ただ、対決と言いましても、悪霊は最初から負けを認めています。彼らはイエスさまを「神の子」と呼んでいます。彼らはイエスさまが神の独り子、真の神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のため、精一杯の抵抗として「かまわないでくれ」と叫びます。
悪霊たちは終わりの日が来れば、自分たちが滅ぼされると知っているのです。まだその終わりの日は来ていないのに、イエスさまがやってきて、自分たちを滅ぼそうとしている。イエスさまはまだ一言も語っておられませんけれども、悪霊たちにはそれがわかるのです。だから彼らは、追い出すならあの豚の群れに乗り移らせてくれと言っているのです。豚は、ユダヤ人たちの間では汚れた動物とされていました。その汚れた動物になら、乗り移らせてもらえるだろう、人間の中にいるように快適なわけにはいかないが、何とかそこに住処を得られるだろう、ということです。このように、ここでのイエスさまと悪霊の対決は、対決などと呼べ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の、神の子としての圧倒的な力、権威の前に、悪霊はただ恐れ、逃げ腰になり、何とか生き延びることだけを考えているのです。これがイエスさまと悪霊との力関係です。このことこそ、ここから私たちが読み取らなければならない最も大事なメッセージです。悪霊は私たちを支配し、私たちの言葉を乗っ取り、関係を破壊し、お互いを得体の知れないものと恐れさせています。私たちはその悪霊に翻弄されて、交わりを失い、お互いを恐れるようになってしまっています。しかしその悪霊の力も、神の独り子、主イエス・キリストの前では、このように無力なのです。主イエス・キリストは、悪霊に勝利する圧倒的な力を持っている神の子なのです。
「豚の群れの中にやってくれ」という悪霊の願い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行け」と言われました。今日の聖書箇所でイエスさまがお語りになったのはこの一言だけです。しかしその一言が、すさまじい力を発揮しました。この一言によって悪霊はこの人たちから出て、豚の群れの中に入りました。すると、豚の群れはみな崖を下って湖になだれ込み、おぼれ死んでしまったのです。
悪霊たちは、豚の群れの中でなんとか生き延びようとしましたが、彼らが入ったとたんに豚の群れは湖に身を投げて死んでしまったのです。それは、その豚の群れと一緒に悪霊たちも滅ぼされ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世の終わりに神さまによって実現するはずの悪霊の滅びが、今この時にイエスさまによって起ったのです。そしてそれによって、それまで凶暴で誰もそばに寄れず、人との交わりを失って墓場に住むしかなかった二人の人が正気を取り戻したのです。人と言葉を通じ合わせ、交わりを持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死んだ者同然であった彼らが、もう一度新しく生き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さに彼らは墓場から復活したのです。
この物語は、今の自分たちとは関係のない話のように思ってしまいますが、悪霊は今の時代でも、その形を変えて私たちを支配しようとしています。悪霊は私たちに、自分は自由に、思い通りに生きていると思わせておいて、私たちの言葉を乗っ取り、悪霊の言葉を語らせています。そのために私たちはお互いに言葉が通じなくなり、傷つけ合い、お互いを恐れて共に生き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ているのです。悪霊はそのように私たちを神さまから引き離すことによって他の人からも引き離し、交わりを破壊しているのです。それが悪霊に支配され、墓場に閉じ込められている私たちの姿なのです。
そんな私たちのもとにイエスさまの方から会いに来てくださ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後、すぐにまた湖を渡ってカファルナウムに戻られます。イエスさまはこの悪霊に取りつかれた人たちに会うためだけに湖を渡り、異邦人の土地に来られたようです。私たちがこの人たちと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に会いに行くことができるのは、まず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ところに来て下さったからです。主なる神さまがわざわざ私たちに会いに来てくださるのです。
そして、その時に、私たちは決断を迫られます。心の奥底にある真の言葉をイエスさまに投げかけられるのか、また、イエスさまの中に神さまの権威を認めて、イエスさまの言葉に従うことができるのか、どうかということです。
町中の人たちもイエスさまに会うためにやって来ました。しかし、彼らは「この地方から出て行ってくれ」と願うためでした。彼らはイエスさまの祝福を拒んだのです。彼らにとっては、二人の悪霊に取りつかれた人たちが救われるよりも豚の方が(経済が)大事であったと言えます。
キリストを得て豚を失うか、豚を得てキリストを失うか、どちらを取るかと迫れたとき、ガダラの人々は豚を選んだのです。これは、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に伴う選択として私たちに問われます。彼らはイエスさまをあからさまに非難したりはしません。ただ、迷惑だから去ってほしいという態度です。彼らにとっては、霊的なことにさほど関心はないのです。今の生活だけが大事。だから、今の生活には干渉しないでほしいとイエスさまに願ったのです。
皆さん、この選択を迫られた時に、キリストを得る者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神さまを求めて行きたいと思うのです。真の神さまと出会わなければ、自分とは誰なのか、何なのか、罪から救われる方法は?自分の価値は?という答えは見つかりません。キリストは真の人となられた真の神さまとして、その答えを下さるために来られたの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を通して神さまの愛を受入れ、キリストを罪からの救い主と信じ神さまに立ち返った時、本当の自分を見出し、新しい生き方へと踏み出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2025년 2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마태복음 8장 28~34절
예수님 일행이 이방인이 사는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께 “귀신을 쫓아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 바라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절)
이것은 이 사람들의 외침이라기보다는 귀신들의 외침입니다. 귀신이 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신의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귀신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교제가 상실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무덤에 살았던 것은 상징적인 일입니다. 무덤은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의 장소입니다. 즉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교제를 잃어버릴 때 우리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무덤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하나, 그들이 마을에서 쫓겨나 무덤에 살아야만 하는 사정도 있을 것입니다. 곧 폭력을 행사하고 말도 통하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인 그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쫓겨나 무덤에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과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교제에서 배제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 무덤에 살고 있는 이 상황은 우리 사회의 축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는 확실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 본심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구원해 주세요” 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에게 상관하지 말아주세요,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라는 욕입니다. 그 욕을 그들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리 내어 표현하지 못하지만 구원을 청하는 외침을 들으시며 그들을 지배하고 그 말을 하지 못하도록 틀어 막고 있는 귀신들과 대결하신 것입니다.
다만 대결이라고 해도 귀신들은 처음부터 패배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외아들, 진정한 하나님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의 저항으로 “상관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외칩니다.
귀신들은 마지막 날이 오면 자신들이 망한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 마지막 날은 오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찾아와 자신들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지만 귀신들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쫓아내시려면 저 돼지떼에 들여 보내달라고 하는 겁니다. 돼지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더러운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그 더러운 동물이라면 들여보내 주실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것처럼 쾌적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거기에 살 곳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서 예수님과 귀신들의 대결은 대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압도적인 힘, 권위 앞에 귀신들은 그저 두려워하며 도망치려 하고 어떻게든 살아 남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귀신들의 역학관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여기서 우리가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귀신들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말을 빼앗고,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를 정체 모를 것으로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귀신들에게 농락당하고, 교제를 잃고,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들의 힘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이처럼 무력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귀신들에게 승리하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돼지떼에 들여 보내달라”는 귀신들의 소원에 예수님께서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한마디뿐입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굉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 한마디로 귀신들은 이 사람들에게서 나와 돼지 무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떼는 모두 절벽을 내려가 호수에 휩쓸려 들어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귀신들은 돼지떼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지만, 그들이 들어가자마자 돼지떼는 호수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 돼지 무리와 함께 귀신들도 멸망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 하나님에 의해 실현되어야 할 귀신들의 멸망이 지금 이 때 예수님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때까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곁에 들르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잃고 무덤에 살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사람들과 말을 통해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그들이 다시 한 번 새롭게 살 수 있게 되면서 바로 그들은 무덤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들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생각하게 되지만 귀신들은 지금의 시대에서도 그 형태를 바꾸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롭게, 뜻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놓고, 우리의 말을 빼앗아 귀신들의 말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두려워하며 함께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그처럼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떼어놓아 교제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귀신의 지배를 받고 무덤에 갇혀 있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 곁에 예수님께서 만나러 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후에 곧 다시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 들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호수를 건너 이방인들의 땅에 오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보러 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본심을 예수님께 말할 수 있는가, 또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지방에서 나가 달라”고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두 귀신 들린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보다 돼지가 (경제가) 더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돼지를 잃을 것인가? 아니면, 돼지를 얻고 그리스도를 잃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다라 사람들은 돼지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따른 선택으로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귀찮으니까 떠나달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삶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지금의 삶에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바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선택을 강요받을 때 그리스도를 얻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아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하나님과 만나지 않으면 자신은 누구인지, 무엇인지, 죄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무엇인지, 자신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사람이 되신 참된 하나님으로 그 답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로 믿고 하나님께 돌아섰을 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