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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3月0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3月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二(고린도후서) 6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2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4 (四旬節 [1] )
〇讃    頌    讃頌歌 53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9章 9~13節
〇説   教    「罪人を招くキリスト
                 (죄인을 부르시는 그리스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9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3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罪人を招くキリスト」
                 マタイによる福音書 9章 9~13節


 先週、キリストの罪を赦す権威について学びました。今日の聖書箇所では、罪を赦す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キリストが罪人を招い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を見ることが出来ます。その実例としてマタイという人物がクローズアップされています。


 マタイは徴税人です。ローマ帝国に納める税金を徴収するのが仕事です。ただ、徴税人の中には、ずるい方法で私腹を肥す者もいたようです。上流階級のユダヤ人からは賄賂をもらい、税金を安くしたりして、社会の中での自分の身の安全を保証してもらい、逆に、下層階級のユダヤ人からは暴力を用いてでも厳しく取り立てたりする者もいました。
 そのため、徴税人は人々から特別に嫌われており、罪人として会堂から締め出され、ユダヤ人の交わりからは爪弾きにされていました。
 そのような収税人であるマタイに、イエスさまは積極的に近づいて行かれ、声をかけられまし
た。そのイエスさまの言葉が9節に記されています。「わたしに従いなさい。」(9節) 


 マタイは、イエスさまのこの言葉にすぐに従ったと言いますが、その理由も、また、それまでの経緯も何も記されていません。人は全くの見知らぬ人物に声をかけられて、すぐに従うようなことはしません。恐らく、マタイはカファルナウムの収税所で道行く人からイエスさまのうわさは聞いていたのでしょう。もしかしたら、中風の人の癒やしの御業を見、イエスさまの説教も聞い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彼はすでに悔い改めの心が与えられ、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認める信仰も芽生えて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そうだとすれば、あとは、従う決断をするだけです。


 それは徴税人であることを完全にやめることを意味します。でも、この決断には勇気が必要です。マタイにとっては一大決心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でも、マタイは迷わずキリストに従いました。彼は、お金や地位よりも、すばらしいものを得たのです。それまでの疎外感、空しさは消え、キリストと出会えた喜びで心は満たされました。


 マタイが突然徴税人をやめたことは、町の噂になったでしょう。マタイはこの喜びを多くの人に知ってもらいたくて、イエスさまを自分の家に招待して、宴会を開きました。マタイの家には、それまでの仲間だった徴税人や世間から罪人と見做されていた人たちが大勢集まりました。「徴税人や罪人も大勢やって来て」、それはそれは評判の悪い人たちばかりです。その真ん中にイエスさまは座っておられたのです。マタイは救われた喜びから、自分と同じような人たちを、キリスト中心の祝宴に招待しました。もしかしたら、彼らの中からマタイと同じようにキリストに立ち返る者たちが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


 ところが、この宴会を非難する者たちがおりました。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です。「なぜ、あなたたちの先生は徴税人や罪人と一緒に食事をするのか。」(11節)
 この「ファリサイ派の人々」というのは、神さまの掟に従って清く正しい生活をしていた真面目な人々のグループです。「ファリサイ」という言葉は「分離」を意味します。汚れた者たちから自分を分離する、罪人たちから自分を分離する、そういう意味です。当然、彼らは宴会の会場には入らず、外から覗いておりました。


 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何であんな類の人間たちと付き合っているのか」と言うわけですが、本人にではなく弟子たちにそう告げたのですから、これは陰口に当たります。そんな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批難の言葉を聞いて、イエスさまはこう言われます。「医者を必要とするのは、丈夫な人ではなく病人である。『わたしが求めるのは憐れみであって、いけにえではない』とはどういう意味か、行って学びなさい。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12-13節)


 イエスさまはご自身を医者に例えながら、病人のために来たのだと語ります。ここで「丈夫な人」というのは、自分を清く正しく良い人間とみなす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のことです。そして「病人」とは、徴税人や罪人たちのことです。もちろん、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も病人であるのですが、彼らにはその自覚がありません。彼らは、徴税人や罪人たちは地獄行きだが、自分たちはこのままで御国に入ることが出来ると思い違いをしておりました。


 「わたしが求めるのは憐れみであって、いけにえではない」という言葉は、旧約聖書ホセア6章6節からの引用で、「どういう意味か、行って学びなさい」というのは、ユダヤ教のラビがよく使う言葉でありました。イエスさま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律法を守り、神殿で神さまに犠牲をささげることには熱心であるけれども、神さまが人間に求めておられるのは「憐れみ」であるのに、あなたたちは「愛、恵み、いつくしみ、あわれみ」をなおざりにしていると逆に批判しているのです。実際、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徴税人たちを地獄行きの罪人として断罪し、つきあいを避けておりました。こうして、救いに導かなければならない人との接触を避け、お上品ぶって、自分たちだけで固まっておりました。


 イエスさまは、そういう正しい人には医者はいらないでしょうと言われます。自分は病んでいると知っている人が医者を求めて来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自分を罪人だと知るものにこそ救い主が必要とされます。だから、イエスさまは「罪人」のもとを訪ねて行かれ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徴税人マタイのところを訪ね、祝宴が開かれました。その祝宴に集う罪人たちは、生きることの辛さや重さを身にしみて感じている人たちです。彼らのすべてがイエスさまに受け入れられています。「私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と仰った通り、イエスさまは罪人をご自分の元に招くお方なのです。


 皆さん、今、私たちは礼拝をささげておりますが、ここはマタイの家と同じなのです。ここでイエスさまが祝宴を開いておられます。問題なのは、私たちがこの場所に自分の居場所を見つけられるでしょうか。マタイと共にイエスさまを迎えて喜んでいるのか、それとも、罪人たちの交わりを外から眺め、不審に思うのか、ここで問われているのはイエスさまに対する私たちの信仰なのです。

 イエスさま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ような「妬む」人々の手によって裁判にかけられ、十字架で処刑されて、この世の中から排除されます。そのことを覚悟の上で、イエスさまは罪人の間に席を設けられ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の死は、罪人を愛し、放っては置かない神さまの愛の表れです。神さまはイエスさまの死を、罪人の罪のつぐないとして受け取られました。自分の罪のために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私たちに代わって、イエスさまが罰を受け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によって、私たちは神さまの前に罪のないものと見なされて、完全な赦しと永遠の命を神さまから与えられます。


 イエスさまは罪人の救いのために世に来られた神の子です。十字架で死んだイエスさまが三日目に復活したことは、私たちがイエスさまによる救いを信じるための保証です。誰もがこの世で罪人の一人でしかない生涯を送ります。その果てに待つのは、罪の裁きしかありません。けれども、神さまが私たち一人一人に望んでおられるのは、そのように私たちが人生の終わりを迎えることではなくて、神さまに立ち返って、生涯を神さまと共に喜んで生きることです。そのために遣わされたお方がイエス・キリストです。このお方の招きに是非とも応えていただき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3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죄인을 부르시는 그리스도” 
                                마태복음 9장 9~13절


  지난 주에는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서는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부르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실례로 마태라는 인물이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로마 제국에 납부할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들 중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리를 챙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류층 유대인들로부터는 뇌물을 받아 세금을 낮춰주면서 사회 내에서 자신의 신변안전을 보장받는 한편, 하층계급 유대인들에게는 폭력을 써서라도 엄격하게 징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미움을 받았고, 죄인으로서 회당에서 쫓겨나고, 유대인의 교제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리인 마태에게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9절)


 마태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즉시 따랐다고 하지만, 그 이유나 또 그전의 경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통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건네 온다고 곧바로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따르지 않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마태는 가버나움의 세금 징수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예수님의 설교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는 믿음도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따르기로 결단을 내리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세리로서의 직책을 완전히 그만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결단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태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망설임 없이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그는 돈이나 지위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동안의 소외감, 허무함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으로 마음은 가득 채워졌습니다.


 마태가 갑자기 세리 일을 그만둔 것은 마을의 소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습니다. 마태의 집에는 그동안 함께 일했던 세리들이나 세상으로부터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그들은 모두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은 앉아 계셨습니다. 마태는 구원받은 기쁨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어쩌면 그들 중에서 마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잔치를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
 이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깨끗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던 성실한 사람들의 그룹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를 뜻합니다. 더러운 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죄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잔칫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저런 종류의 인간들과 어울리느냐고 했지만, 직접 예수님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했으니 이는 뒷담화에 해당합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라” (12~13절)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시며 병든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건강한 자”라는 것은 자신을 깨끗하고 바르고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병든 자”는 세리나 죄인들을 말합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도 역시 병든 자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러한 자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죄인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신들은 이대로 가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라는 말은 구약성서 호세아 6장 6절에서 인용한 것이고, “무슨 뜻인지 가서 배우라”는 것은 유대교 랍비들이 자주 쓰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서 하나님에게 희생을 바치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긍휼”인데, 당신들은 “사랑, 은혜, 자비, 연민”을 등한시하고 있다고 역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을 지옥행 죄인으로 단죄하고 교제를 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으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고상한 척하며 자신들끼리만 뭉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올바른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병든 것을 아는 사람이 의사를 찾듯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아는 사람에게야말로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의 곳을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을 방문하시니 그곳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잔치에 모이는 죄인들은 삶의 고통과 무게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 받아들여졌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자기 곁으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여기는 마태의 집과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잔치를 열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장소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마태와 함께 예수님을 맞이해 기뻐하고 있는지, 아니면 죄인들의 교제를 밖에서 바라보고 미심쩍어하는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질투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되고 이 세상에서 배제되셨습니다. 그 사실을 각오하고 예수님은 죄인들 사이에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사랑하고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죄인의 대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완전한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셋째 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기 위한 보증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죄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애를 보내며,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죄의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인생의 끝을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서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분의 초대에 꼭 응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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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3月0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