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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3月1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3月1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エフェソ(에베소서) 4章 22~24節
〇讃    頌    讃頌歌 2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5 (四旬節 [2] )
〇讃    頌    讃頌歌 14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9章 14~17節
〇説   教    「新たな信仰へ(새로운 믿음으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86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3月 1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新たな信仰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9章 14~17節

 罪人の代表のように見做されていた徴税人であるマタイが救われ、マタイは喜びの祝宴を開きました。その祝宴の真ん中にイエスさまは座っておられたのです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なぜ、あなたたちの先生は徴税人や罪人と一緒に食事をするのか」(11節)と批難しました。それが、先週の聖書箇所です。


 そして、今日の聖書箇所では、喜びに満ちた食卓の場に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弟子たちがやって来て、「わたし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よく断食をしているのに、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断食をしないのですか」(14節)と、イエスさまに問いかけています。これは質問と言うより批難の言葉です。ファリサイ派の人々もヨハネの弟子たちも、ユダヤ人として身に付けた聖なる習慣を重んじていました。その一つに「断食」がありました。


 けれども、イエスさまと弟子たちの間では、断食をしている様子は見られません。むしろ、罪人たちと一緒になって飲んだり食べたりしているのです。そんなことで良いのかという非難を込めた疑問がヨハネの弟子たちにはあ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行動はユダヤ教の伝統を無視した余りにも型破りなものに見え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その疑問に対し、当時の結婚の習慣を引き合いに出して、こう答えられました。「花婿が一緒にいる間、婚礼の客は悲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しかし、花婿が奪い取られる問いが来る。その時、断食することになる。」(15節)
 当時、結婚した夫婦は新婚旅行には行かず、家にいてその楽しさを味わいました。新婚夫婦は結婚後一週間の間、自分の家を開放し、「婚礼の客」と言われる親しい友人たちは、花婿、花嫁と共に喜び、祝いました。花婿と花嫁は王様と王妃のような扱いを受けたようです。平素、貧しく質素な生活をしていた人たちも、この時ばかりは、一生に一度の楽しさを味わいました。それなのにどうして喪に服したように、悲しむことができるか、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断食の「時」について語っております。「花婿が奪い取られる時が来る」、これは明らかに十字架刑のことが意識されています。断食は深く悲しむ行為の一つですが、イエスさまが十字架刑に処せられる時には断食せざるを得なくなるのです。しかし今は、イエスさまといることを喜ぶ時であり、断食の時ではないというのです。


 イエスさまは「断食」そのものを否定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また、ユダヤ教の伝統を軽んじているのでもありません。問題にしているのは、その行為の中にある信仰なのです。それが真に神さまが喜ばれるものになっているのか、なのです。断食にしろ、祈りにしろ、献げ物にしろ、それが形式的なものに過ぎなければ神さまに届くものにはならないのです。


 それからイエスさまは福音の真理についてたとえを用いて語られました。「だれも、織りたての布から布切れを取って、古い服に継ぎを当てたりはしない。新しい布切れが服を引き裂き、破れはいっそうひどくなるからだ。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革袋に入れる者はい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革袋は破れ、ぶどう酒は流れ出て、革袋もだめになる。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革袋に入れるものだ。そうすれば、両方とも長もちする。」(16-17節)
 ここで語られている二つの例えで意図されることは十分理解出来るかと思います。つまり、イエスさまが御自身と共に持って来られたものは、全く新しいものだ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これを受け取る者も新しくならね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ユダヤの人々の戒律的な信仰生活は、それがいくら敬虔さの表明であったとしても、イエス・キリストが世に来られたことによって更新されます。もはや、古い儀式や制度が信仰を束縛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イエス・キリストが与えてくださる罪の赦しは、罪人を自由へと解放するのです。罪赦された人は聖霊をいただきます。聖霊は信仰者を内側から新しくします。人が心から神さまを慕って、イエスさまに従うようになることが信仰による救いです。聖霊の恵みによって、人は自発的にキリストに従うようになります。その自由によって祈りをささげ、断食を行い、喜びの礼拝をささげるのです。


 新しいものを内に宿した新しい器とは、聖霊を宿した新しい人のことです。それは、新しい命に甦った新しい人といってよいかと思います。キリストを信じて神さまに立ち帰った私たちは、キリストの新しい命に生かされた新しい人間です。年齢は関係ありません。信じた時期も関係ありません。キリストは、私たちを霊において新しく創り変えるために私たちの元を訪れ、私たちを信仰者に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ですから、古い服は私たちに相応しくありません。古い器にも留まってはおれません。律法による、つまり業による義を求め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による恵みの義をまとって、私たちを新しい信仰の歩みへと向かわせのです。
 それは、私たちの日常生活にも変化をもたらします。私たちの信仰は、家族などの血縁関係においても、交友関係においても、職場も地域においてもすべてが関ってお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の命を受けた時から、もはやこれらの関係に所有されてはいません。新しい生地は古い服を引き裂いてしまいます。だからといって、すべての関係を断ち切るというのではなくて、新たにされた者として、新たな関係、新たな交わりを創り出すのです。単に、血縁関係に頼ったり、交友関係の古さや、地域の交わりに依存して生きるのではなくて、神のものとして、主イエスの御言葉を頼りに、真の義と愛を目指して生きることで、そうした地上の関係に祝福をもたらすことが、私たちの新しい生活です。


 そして、それは私たちの教会のあり方にも関係します。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革袋に入れれば、新酒が発酵する力によって古い革袋は破裂してしまいます。だから、新しいぶどう酒は入れないことにする、ということではもはや教会ではなくなりますから、いつでも教会は聖霊の促しによって器を新しくする準備が必要です。それは教会が常に御言葉を新しく読み続け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よく、教会も時代に即して変化しなければ化石化するなどと言われますが、そういう時代に即した変化が優先するのでもありません。私たちの教会は、聖書の御言葉から常に福音の本質を読み取りながら、「器」を新し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のために聖霊はいつも新しく生きた言葉を私たちに示してくれます。教会に必要なのは、そうした福音の本質との関わりで教会の在り方を検証していくことです。それが、御言葉に従った教会を建てることの実質となります。


 教会は新しい命によって、活性化された命を生きています。それは、私たち個人にとっても同様です。古い身体は朽ちていくだけです。私の体も、人間関係も、社会も、地域も、国も、古びてやがては朽ち果てます。永遠に変わらないのは神さまだけであり、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命として、永遠の命を保っておられます。この新しさを私たちは自らの信仰の内に、いつも活き活きと保つもの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3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새로운 믿음으로”    마태복음 9장 14~17절


 죄인의 대표처럼 여겨지던 세리인 마태가 구원을 받고, 마태는 기쁨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 잔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앉아 계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절)라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이 지난주 성경 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기쁨이 가득한 자리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절)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다 비난의 말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요한의 제자들도 유대인으로서 익힌 성스러운 관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금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라는 비난이 담긴 의문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유대교의 전통을 무시한 너무나도 파격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의문에 대해 당시의 결혼 습관을 예로 들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절)
 당시 결혼한 부부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집에 머물며 그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신혼부부는 결혼 후 일주일 동안 자신의 집을 개방했고, “혼인잔치의 손님”이라고 불리는 친한 친구들이 신랑, 신부와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마치 왕과 왕비처럼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일생에 한 번뿐인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상을 당해 애도하는 사람처럼 슬퍼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이것은 분명히 십자가형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금식은 깊은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 중 하나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지실 때에는 제자들도 금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기쁨의 때이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 그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유대교의 전통을 가볍게 여기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그 행위 속에 담긴 신앙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금식을 하든, 기도를 하든, 헌물을 하든, 그것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하나님께 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6-17절)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비유의 뜻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며 따라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그것이 아무리 경건함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새롭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낡은 의식이나 제도가 신앙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사함은 죄인을 자유롭게 해방하십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신앙인을 내면으로부터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 믿음에 의한 구원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금식 하며,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내적으로 간직한 새로운 그릇이란 성령이 깃든 새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난 새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온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은 시기도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우리 곁에 찾아오셨으며, 우리를 믿는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낡은 옷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래된 그릇에도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의한, 즉 행함에 의한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의 의를 입고 우리를 새로운 믿음의 길로 나아가야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족과의 혈연관계, 교우관계, 직장과 지역 사회까지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순간부터 더 이상 이러한 관계에 소유되지 않습니다. 새 옷감은 낡은 옷을 찢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새롭게 된 자로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교제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단순히 혈연관계에 의지하거나, 오래된 친분에 매달리거나, 지역사회의 유대에만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소유된 자로서 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참된 의와 사랑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삶이며 그러한 삶을 통해 세상의 관계에도 축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교회의 올바른 자세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오래된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술이 발효되는 힘에 의해 오래된 가죽 부대가 터져 버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포도주를 넣지 않기로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 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교회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릇을 새롭게 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항상 말씀을 새롭게 읽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종 교회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화석화된다고 합니다만, 그런 시대에 맞는 변화가 우선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항상 성경 말씀에서 복음의 본질을 읽어가며 “그릇”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은 언제나 새롭고 살아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복음의 본질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존재 방식을 검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따른 교회를 세우는 실질적인 방법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생명에 의해 활성화된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낡은 몸은 썩어갈 뿐입니다. 나의 몸도, 인간관계도, 사회도, 지역도, 나라도, 모두 낡아서 결국은 썩어버릴 것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보존하고 계십니다. 이 새로움을 우리는 스스로의 믿음 안에서 항상 활기차게 유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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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3月16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