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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4月20日 復活節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4月20日 復活節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ルカ(누가복음) 22章 31~32節
〇讃    頌    讃頌歌 15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33 (復活節 [1] )
〇讃    頌    讃頌歌 160
〇聖書奉読    マルコによる福音書(마가복음)
         16章 1~8節
〇説   教    「誰が石を転がしてくれるのか
          (누가 돌을 굴려줄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6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64(1, 4節)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4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誰が石を転がしてくれるだろうか」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6章 1~8節


 今日の御言葉は、私たちに一体何を伝えよ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復活という出来事が、どのように起こったのかと考えるのではなく、天使が伝える「あの方は復活なさって、ここにおられない」という言葉を、ただ信じなさ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復活という出来事の真偽が問題ではなく、私たちの信仰が問題となるのです。この私たちの信仰が、復活の喜びに与らせ、永遠の命に与らせるものだと言う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死を最後まで看取った女性たちが、安息日が終わった、すなわち日曜日の早朝、まだ暗いうちに、イエスさまのご遺体に油(香料)を塗るため墓に向かいました。彼女たちはそれぞれがイエスさまに対して特別な思いを持っている人たちでした。感謝の思い、愛する思い、そのような思いで、今更何も出来ないけれど、せめてイエスさまの傍らにいたかったのです。
 しかし、墓に向かっている途中、彼女たちは一つの問題があることに気付きました。それは、墓の入り口が大きな石で塞がれていることです。彼女たちは言います。「だれが墓の入り口からあの石を転がしてくれるでしょうか」(3節)。


 イエスさまの墓は大きな石で塞がれておりました。この石は女性たちが何人いても女性の力では動かせ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しかも、その石はローマ帝国が封印の意味で置いたものであり、ローマ兵が監視しておりました。その石を動かさない限り、中に入ってイエスさまの体に香油を塗ることはできません。とても無理です。それでも女性たちは墓に向かって行きました。


 彼女たちはイエスさまの墓に向かう途中、「だれが墓の入り口から石を転がしてくれるでしょうか」と話し合っていたと言います。ここが彼女たちが普通とは違うところだと思います。それが信仰のなせる業なのかもしれませんが、普通だったら、行動を起こす前に話し合うでしょ。話し合っている中で、「行っても無駄ではないか?墓の入り口にある石をどやって動かすのか?そこにはローマ兵たちがいるじゃないか?」といった話も出るでしょう。そして、「どう考えても無理に決まっている。その前に香料を買ってもただのお金の無駄遣いだ」という結論が出てもおかしくありません。


 彼女たちだってそんなことは分かっていたはずです。それでも、彼女たちは行動を起こしたのです。それくらいイエスさまに対する思いが強か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に対する愛が彼女たちを突き動かしたのです。その前に立ちはだかった大きな石も、彼女たちにとっては問題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愛がなければその大きな石を前にして何も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あの石をどうしよう」で終わっていたはずです。でも愛は不可能を可能にします。彼女たちの行動は、まさに計算が成り立ちません。しかし、それが愛なのです。


 考えてみれば、イエスさまの生涯もそう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計算では成り立ちません。この世の目から見たら愚かなことのように見えます。その極めつけが十字架です。十字架で死なれることでした。イエスさまは敵対する人々を救うために十字架にかかって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十字架の上で、自分を十字架につけた人々のために執り成しの祈りを献げられたのです。
 このような愛は、この世の常識では考えられません。人間の計算をはるかに超えています。しかし、そうでなければ見いだせない大切なことがあるのです。そのことに気付かないと、大切なものを失っ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す。


 注目すべきことは、彼女たちがここで「だれが」と言っていることです。「だれが墓の入り口から石を転がしてくれるでしょうか。」と。この「だれが」が重要です。彼女たちは自分たちにはできないことが最初から分かっていたので、誰か他の人に頼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だれが墓の入り口から石を転がしてくれるでしょうか」と。
 でも、普通はそう考えないでしょ。普通は「どうやって」と。「どうやってあの石を転がすことができるか」と考えるかと思う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に考えてばかりいて、行動に移せません。しかし、彼女たちは違いました。


 彼女たちは「なぜ」とか「どうやって」ではなく、「だれが」と言いました。なぜ男の弟子たちは一緒に来ないのかとか、どうやって墓の入り口から石を転がしたら良いのかではなく、誰が転がしてくれるかと言ったのです。
 皆さん、「だれが墓の入り口の石を転が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そうです、イエス・キリストです。イエスさまが死から甦って墓から石を転がしてくださいます。


 これは私たちにも問われていることです。私たちは「だれが」の前に「どうやって」と問うてしまいます。「なぜ」こういうふうになっているのか、「いつ」「どこへ」行ったらいいのかと、その状況とか、方法とかを考えてしまうあまり、何もできなくなってしまうのです。でも彼女たちは違いました。もう動いています。動いている最中で「だれが墓の入り口から石を転がしてくれるでしょうか」と話し合っていました。彼女たちは自分たちにできないことは考えませんでした。だれかがしてくれると信じていたのです。彼女たちは、復活の信仰を持っていたとも言えるでしょう。それは私たちにも求められていることです。「どうやって」ではなく、復活の主があなたの心を塞いでいる石を転がしてくださると信じて、イエスさまのもと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イエスさまに会いに行こうとする時、そこに大きな石のような問題が立ちはだかっていることがあります。でもその時、イエスさまがすべての問題を解決してくださると信じて、イエスさまのもとに行くなら、その問題はすでに解決されているのです。あの大きな石は転がしてあるのです。
 彼女たちが墓に向かったのは、まだ暗いうちでした。人生の暗いうちにはまだ大きな石がたちはだかっています。でも、私たちがキリストに向かって歩き始めるなら、どんなに人生が暗かろうと、どんなに大きな問題が立ちはだかろうと、どんなにそれが不確かであろうと、キリストがそれを取り除いてくださるのです。私たちに求められているのは、イエスさまがこの石を転がしてくださると信じて、イエスさまのもとに歩き出すことなのです。


 そして、私たちも彼女たちと同じ体験をすることになります。私たちの心を塞いでいた大きな石が転がされるという体験です。どんなに悩みがあろうと、どんなに疑問があろうと、どんなに問題があろうと、イエスさまはあなたの心に立ちはだかる石を転がしてくださいます。なぜなら、イエスさまは復活されたからです。


 彼女たちは直接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に会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彼女たちは復活の最初の証言者となりました。彼女たちが天使から「さあ、行って、弟子たちとペトロに告げなさい。『あの方は、あなたがたより先にガリラヤへ行かれる。かねて言われたとおり、そこでお目にかかれる』と」(7節)という言葉が与えられました。最初の証言者として、新たな使命が彼女たちに与えられたのです。それがガリラヤで復活の主イエスさまに会うことが出来ると弟子たちに伝えることでした。


 ここに、わざわざペトロの名前が挙げられておりますが、ペトロは公の場で三度もイエスさまを否定しました。ペトロは今さら、どの面下げてイエスさまに会えるでしょうか。だからこそ、天使はペトロにガリラヤで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に会い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ペトロはとてもイエスさまの復活の証人として相応しいとは思えません。しかし、そのようなペトロを復活の主イエスさまは愛し、励まされ、用いてくださるのです。
 それは私たちも同じです。このイエスさまの愛は、同じように私たち一人ひとりに注がれています。神さまに背いてばかり、神さまになかなか従えない、こんな私をイエスさまは愛し、恵みを注いでいてくださるのです。


【2025년 4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누가 돌을 굴려줄까”  마가복음 16장 1~8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활이라는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전한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을 그저 믿으라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의 진위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안식일이 끝난, 즉 일요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녀들은 각자 예수님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이제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 곁에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으로 가는 도중 그녀들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무덤 입구가 큰 돌로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들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절).


 예수님의 무덤은 큰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이 돌은 여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돌은 로마 제국이 봉인의 의미로 둔 것이어서 로마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돌을 움직이지 않는 한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를 수 없습니다. 도저히 무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누가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점이 그녀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만들어 낸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라면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의논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의논 속에서 “가봐야 소용없는 거 아니야?”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을 어떻게 움직이겠어?” “거기에는 로마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라는 이야기도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그전에 향료를 사는 것도 그저 돈 낭비일 뿐이야” 라는 결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들 또한 그런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깊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녀들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큰 돌도 그녀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그 큰 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 돌을 어떻게 하지?”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녀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계산이 맞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생애도 그러하지 않았을까요?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계산을 훨씬 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놓쳐버릴 수 경우가 있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녀들이 여기서 “누가”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이 “누가” 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누가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어떻게”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 돌을 굴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달랐습니다.


 그녀들은 “왜”라든가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라고 말했습니다. 왜 남자 제자들은 함께 오지 않는가, 어떻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길 수 있을까를 묻는 대신, 누가 그 돌을 굴려 줄 것인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며 무덤의 돌을 굴려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라고 묻기 전에 “어떻게”라고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언제”, “어디로” 가야하는지 등 그 상황과 방법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달랐습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도중에 “누가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줄까”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해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이미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요구되고 있는 믿음입니다. “어떻게”가 아니라 부활의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막고 있는 돌을 굴려주실 것이라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러 가고자 할 때, 우리 앞에는 큰 돌과 같은 문제들이 가로막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입니다. 그 큰 돌은 이미 굴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녀들이 무덤을 향해 간 것은 아직 어두운 때였습니다. 인생이 어두울 때, 앞을 막는 큰 돌이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인생이 어둡더라도, 아무리 큰 문제가 앞을 가로막더라도,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제거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돌을 굴려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녀들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막고 있던 큰 돌이 굴려지는 체험입니다. 아무리 고민이 많아도, 의문이 많아도, 문제가 많아도,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굴려 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들은 천사로부터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7절) 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첫 번째 증언자로서 새로운 사명이 그녀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공개 석상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을 다시 만날 면목이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사는 특별히 베드로에게도 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도저히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합당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격려하시며,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은 똑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늘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런 나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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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4月20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