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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4月1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4月1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로마서) 23編 1~3節
〇讃    頌    讃頌歌 3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31 (受難週 [2] )
〇讃    頌    讃頌歌 150
〇聖書奉読    ヨハネによる福音書(요한복음)
         19章 16~30節
〇説   教    「そこに君はいたのか
          (거기 너 있었는가)」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47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4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そこに君はいたのか」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9章16~30節


 受難週を迎えました。今日は、主の十字架の場面の物語、その聖書箇所から主のメッセージを聞きたいと思います。
 イエスさまはピラトの法廷で死刑の判決を受け、刑場まで連れて行かれます。「イエスは、自ら十字架を背負い、いわゆる『されこうべの場所』、すなわちヘブライ語でゴルゴタという所へ向かわれた。」(17節)


 十字架刑の宣告をうけた罪人は自分が架けられる十字架を背負わされ、刑場へ向かうことになっていました。十字架は縦木と横木を組み合わせたもので、相当な重さです。刑場へ向かう道は「ウィア・ドロロサ(悲しみの道)」と呼ばれる、でこぼこの悪路でした。そこを処刑される人が十字架を背負わされ、道の両側には物見高い群衆が押し寄せ、その中で、イエスさまは十字架を背負わされて刑場へ向かわれました。「(されこうべの場所で)彼らは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た。また、イエスと一緒にほかの二人をも、イエスを真ん中にして両側に、十字架につけた。」(18節)


 十字架刑というのは、ローマが政治犯に適用する極刑で、両手両足を釘づけにして地面に立てます。そのため、釘づけにされた両手と両足に全体重がかかり、手と足は引き裂けて、激しい痛みと貧血による気絶と蘇生を繰り返し、一日とか長くて数日間、生死の間をさまよい、力つきて死を迎える刑罰でした。十字架刑は人間の耐えうる限りの極限の苦痛と、辱めをあたえる刑罰であり、それはまた時の権力に背いた者はこうなるという見せしめの刑でもありました。イエスさまはすでに鞭で打たれておりました。体はすでにボロボロです。そのため、イエスさまの体は数時間しか持ちませんでした。


 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イエスさまの衣服を、兵士たちが分け合い、下着については「これは裂かないで、だれのものになるか、くじ引きで決めようと話しあった」(24節)と記しています。そして、ヨハネによる福音書はそれを「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あった」(24節)と記しています。「わたしの衣服のことでくじを引く」というのは、詩編22編19節からの引用ですが、わざわざこのように記すのは、旧約の預言が成就したことを伝えるためです。


 預言が成就したということは、十字架が神さまの意志によって起こったことを意味します。イエスさまは、世を愛し、人を愛し、福音を伝え、癒しの業を行い、人々を救いました。それなのに、最後には身に着けた下着まで奪われ、全てのものを与えた末に、十字架の辱めをうけ、命まで奪われました。しかしそれは神さまの御心だったとヨハネは語っているのです。聖書の語るキリストというのは、「一粒の麦として死んで行かれた」(ヨハネ12:24)、十字架で苦しむ方なのです。
 この十字架の主をどのように見るのか、肉の目で見るのか、信仰の目で見るのかによって、イエスさまの姿はまるで異なってきます。


 私たちはバプテスマを受けることを通して、イエスさまの死に従い、復活の喜びにあずかる者となりました。私たちはバプテスマによってイエス・キリストと結ばれるのです。今日の招詞に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6章5~6節を選びました。「もし、わたしたちがキリストと一体になってその死の姿にあやかるならば、その復活の姿にもあやかれるでしょう。私たちの古い自分が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罪に支配された体が滅ぼされ、もはや罪の奴隷にならないためであると知っています。」(ローマ6:5-6)
 イエス・キリストの死と復活は、今ここにいる私たちの救いにつながっているのです。


 ところで、十字架上のイエスさまの最後を見守ったのは、女性たちでした。そして、イエスさまはその女性たち、特に母マリアを「愛する弟子」に託したのですが、そのことが25~27節に記されています。「イエスの十字架のそばには、その母と母の姉妹、クロパの妻マリアとマグダラのマリアが立っていた。イエスは、母とそのそばにいる、愛する弟子とを見て、母に、『婦人よ、御覧なさい。あなたの子です』と言われた。それから、弟子に言われた。『見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そのときから、その弟子はイエスの母を自分の家に引き取った。」(25-27節)


 ペンテコステ以後、初代教会が生れますが、やがて始まったユダヤ戦争の嵐の中で、信徒たちは世界各地へ逃れることになりますが、古代の伝承によれば、この「愛する弟子」は、イエスさまの母マリアを連れてエフェソに逃れます。そこに教会が生まれ、その教会が生み出した福音書が、この「ヨハネによる福音書」です。


 イエスさまの十字架を記念して多くの讃美歌が書かれましたが、説教後に賛美する讃美歌147番「거기 너 있었는가(きみもそこにいたのか)」もその一つです。この讃美歌はイエスさまの十字架が私たちにどのような意味を持つのかを歌ったものです。
 十字架の下には大勢の人々がいました。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た祭司長や律法学者、イエスさまを処刑するために集められたローマ軍の兵士、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心を引き裂かれている女性たち。その時、私たちはどこにいたのでしょうか。2000年前に、遠いユダヤの地で、ナザレのイエスと呼ばれる男が処刑された、それは私たちとは何の関係もない出来事だと考えるならば、私たちは今日、ここにいません。しかし、私たちはここにいます。この物語は私たちの出来事なのです。


 讃美歌は歌います「君もそこいたのか、主が十字架につく時、おお、思い出せば震え、震える、そこに君はいたのか」。皆さん、「そこにきみはいたのか」と問われ、私たちが「はい」と答える時、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出来事が私たちの出来事になります。
 今、水曜日の聖書研究会でコヘレトの言葉を読んでおりますが、この世の不条理に対し、コヘレトは「空しい」と嘆いております。この嘆きは私たちの叫びでもあります。この世には「神さまはどこにおられるのだ」と叫ばざるを得ないような現実があります。コヘレトはその現実の中で嘆きますが、しかし彼は何も行動しません。私たちも同じです。批判はするが、行動しない。「何をしても同じだ、空しい」というニヒリズムが、私たちを支配しています。


 そんな私たちは、十字架のイエスさまの問いかけに私たちは反論するでしょう。「私たちには何の力もありません。現在の生活を守るだけで精一杯なのです。何ができると言うのですか」と。
 しかし、イエスさまは何も言わず、この世の不条理の中で、死んでいった人々の墓の前で涙を流されます。私たちは、十字架の物語を自分には関係のないこととして受け止めがちです。しかし、この讃美歌は、私たちに「あなたたちは、主の受難に立ち合いながら傍観し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罪の告白を促します。コヘレトは傍観者でした。イエスさまを知らなかったためです。しかし、私たちは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ために命を捧げられたことを知っています。だからもう、傍観者であり続け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またイエスさまの十字架死に立ち会ったのです。でも、その時は何もしないで、出来事を眺めているばかりでした。しかし、人生における悲しみや苦しみの中で、復活のイエスさまに出会いました。だから、今日ここにいる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もう傍観者であることを止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の兄弟であるこの最も小さい者の一人にしたのは、私にしてくれたことなのである。」(マタイ25:40) 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に従う者として生きて行きましょう。その時、私たちの人生は意味あるものに変えられていくのです。


【2025년 4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거기 너 있었는가”   요한복음 19장 16~30절


 고난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 장면의 이야기, 그 성경 구절을 통해서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처형장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7절)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인은 자신이 못 박히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장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세로 기둥과 가로 기둥이 결합된 것으로 상당한 무게가 나갑니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은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라고 불리는 울퉁불퉁한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처형될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했으며, 길 양 옆에는 호기심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형장으로 향하셨습니다. “(해골이라는 곳에서)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8절).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이 정치범에게 내리는 극형으로, 두 손 두 발을 못 박아 땅에 세우는 형벌입니다. 그렇게 못박힌 손과 발에 온몸의 무게가 실려 손발이 찢기고, 극심한 고통과 빈혈로 인한 실신과 의식 회복을 반복하며, 하루나 길게는 수일간 생사의 경계를 헤매다가 힘이 다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의 고통과 수치를 안겨주는 형벌로, 또한 당시 권력에 거스른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공개처형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채찍으로 맞으셨고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몸은 몇 시간밖에 견디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옷을 군인들이 나누어 가지며, 속옷에 대해서는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24절)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것을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절) 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라는 것은 시편 22편 19절에서 인용된 것으로, 일부러 이렇게 적는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치유의 사역을 행하시며,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입고 계시던 속옷까지 빼앗기고,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끝에 십자가의 모욕을 당하시고 목숨까지 빼앗기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한 알의 밀로 죽어 가셨다”(요12:24),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육신의 눈으로 보느냐,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따르고,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 부름으로 로마서 6장 5~6절을 선택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5-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지금 이자리에 있는 우리들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성들, 특히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셨는데, 그 사실이 25~27절에 적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5-27절).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가 탄생하게 되는데, 곧이어 시작된 유대전쟁의 폭풍 속에서 성도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됩니다. 고대의 전승에 따르면 이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가 만들어낸 복음서가 바로 이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여 많은 찬송가가 만들어졌는데, 오늘 설교 후에 부르게 될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찬송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노래합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모인 로마군 병사, 예수님의 십자가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던 여성들,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2000년 전에, 멀리 떨어진 유대 땅에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한 남자가 처형당한 사건이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찬송가는 부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여러분,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가 “네” 라고 대답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곧 우리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수요일 성경공부 모임에서는 “코헬렛의 말씀(전도서)을 읽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코헬렛은 “헛되다”라고 탄식합니다. 이 탄식은 우리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코헬렛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탄식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판은 하지만 행동하지 않습니다. “뭘 해도 똑같다, 헛되다”는 허무주의(니힐리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십자가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아마 이렇게 물음에 반문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아무 힘도 없습니다. 현재의 삶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부조리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자신과 무관한 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고난을 목격하고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라고 말입니다. 코헬렛은 방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일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로서, 함께 걸어갑시다. 그때 우리의 삶은 의미 있는 삶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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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4月1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