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4月0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4月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3編 1~3節
〇讃 頌 讃頌歌 28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8 (四旬節 [5] )
〇讃 頌 讃頌歌 272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9章 35~38節
〇説 教 「飼い主のいない羊のために
(목자 없는 양을 위하여)」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6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4月 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飼い主のいない羊のために」
マタイによる福音書 9章 35~38節
今日の聖書箇所で、4章から始まったイエスさまのお働きが総括されています。35節です。「イエスは町や村を残らず回って、会堂で教え、御国の福音を宣べ伝え、ありとあらゆる病気や患いをいやされた。」(35節)
イエスさまの福音宣教というのは、会堂で教え、御国の福音を宣べ伝え、民衆たちの病気や患いを癒や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病気を癒やしながら、あなたも神さまに愛される神の子だと伝えたのです。それが御国の福音なのだということです。
一通りガリラヤ地方を回り終え、イエスさまの活動は新たな次の段階に進んでいくわけですが、その時、イエスさま何を思われ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が36節です。「また、群衆が飼い主のいない羊のように弱り果て、打ちひしがれているのを見て、深く憐れまれた。」(36節)
イエスさまは群衆をご覧になりました。彼らは「飼い主のいない羊のように弱り果て、打ちひしがれている」と見て取ったのです。「飼い主のいない羊のようだ」と。
旧約聖書の中でも、イスラエルの人々がよく羊に例えられています。詩編23編1~3節にこうあります。「主は羊飼い、わたしには何も欠けることがない。主はわたしを青草の原に休ませ/憩いの水のほとりに伴い/魂を生き返らせてくださる。主は御名にふさわしく/わたしを正しい道に導かれる。」(詩23:1-3)
おそらくこの詩編の詩人は自分のことを羊であると自覚していたのでしょう。「主は羊飼い、わたしには何も欠けることがない」と言っています。神さまは私の羊飼いで、私が生きるために必要なものを与えてくださる、というのです。
ところが、イエスさまが群衆を見ると、群衆たちには飼い主がいないように見えたのです。当時、飼い主や羊飼いがい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ローマ帝国の支配下にあったとはいえ、飼い主である王もいましたし、祭司をはじめとする指導者たちの羊飼いもおりました。戦争のない状態も続いていて、平和であったと言えます。しかし、飼い主や羊飼いである王や指導者たちは、自分の立場を守ることばかり考え、羊がどのような状態であるか見ようともしません。彼らの信仰も形式化し、律法を守り、自分が救われれば良いという、利己的なものになっておりました。社会には律法を守りたくても守れない人々が多くいたのです。しかし、そんな彼らを誰も顧みることなく、捨て置かれていました。人として必要な扱いがされておりません。その結果、憎しみや敵意が満ちあふれ、罪の赦しも恵みもない状態でした。平和のようであっても、言葉や思いでの暴力が社会を覆っていたのです。その深い孤独を、イエスさまは悲しまれ、「深く憐れまれた」のです。
この「深く憐れまれた」という言葉は、「腸がちぎれる」ように、腹の底から湧き上がる深い感情を表しています。誰かがこの弱った羊を守り、育てなければならない。自らがこの羊の飼い主となることを決意するかのような言葉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このように言われています。37節です。「そこで、弟子たちに言われた。「収穫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だから、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収穫の主に願いなさい。」(37-38節)
イエスさまは、弱り果てた羊を求めてガリラヤ地方を歩き回りました。そして、羊と出会えば、御国の福音を語り、あらゆる病気や患いを癒やされました。十分な働きをなさったのです。群衆は元気になりました。少しは社会も良くなりました。十分に満足できる成果で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はそれで満足され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イエスさまは人が病気の癒やしや教えでは簡単に癒やせない深い苦しみを持っていることをご存じであったからです。弱り果てた羊がまだまだ多くいて、その羊たちを救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人間が持つ根本的な罪の問題を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のために、イエスさまは十字架の道を歩み続けるのです。イエスさまが、もし普通の人間であったならば、とっくに放棄していたことでしょう。
ここで、イエスさまが「収穫は多いが」と言われている「収穫」というのは、皆さんもよくお分かりだと思いますが、終わりの日の収穫を意味しております。しかし、それは単に将来の出来事を意味し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今、目の前に、収穫すべき人々はいる、救わなければならない人々がいる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収穫の主に願いなさい」、つまり、祈りなさいとお命じになりました。
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祈る。私たちも「働き手送ってください」と神さまに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ただ、イエスさまがこの後、何をなさ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十二人の弟子たちを選び、派遣さ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を訓練するんですね。イエスさま自ら「働き手」を養成されました。
私たちは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と祈るとき、牧師など、すでに訓練されたものが来ることを考えます。弟子たちももしかしたらそのように考え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イエスさまは外部からの働き手ではなく、弟子たちのうちから、イエスさまの働きを受け継ぐ者を養成されたのです。そして、私と一緒に福音を宣べ伝えようと、願っておられたのでしょう。
もちろん、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によって選ばれ、訓練を受けたにもかかわらず、何度も躓き、失敗を繰り返し、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時には、裏切り逃げてしまいます。それでも、イエスさまは福音宣教の業を、すべての人々を愛する業を弱い弟子たちに託したのです。
皆さん、「収穫は多い」のです。この世には、「弱り果て、打ちひしがれている」人たちがたくさん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人たちが神さまに出会うために、働き手が必要であると言われ、祈るように私たちに命じられました。祈ることだったら、私たちにも出来るでしょう。だから、真剣にもっと私たちは「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もっと、真剣に祈り続けるならば、もしかしたら、私や皆さんを収穫の働き手として用いてくださるかもしれません。
これからも魂の救いを祈ると共に、それぞれが遣わされた所で、福音宣教の働きに携わって行きましょう。
【2025년 4월 6일 주일예배(요약판)】
“목자 없는 양을 위하여” 마태복음 9장 35~38절
오늘 성경 본문에서 4장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총괄되고 있습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35절).
예수님의 복음선교라는 것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백성들의 병과 아픔을 고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병을 치유하시면서 당신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갈릴리 지방을 두루 돌고 나서, 예수님의 사역은 새로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그게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36절).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다” 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양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 1~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
아마 이 시편의 시인은 자신을 양이라고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군중을 보니 그들은 목자가 없는 양들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목자나 양치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지만 목자인 왕도 있었고, 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고, 겉으로는 평화로운 시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나 양치기인 왕이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지킬 생각만 하고 양이 어떤 상태인지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도 형식적이 되었고, 율법을 지키며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에는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 과 사회에는 미움과 적의가 가득했고, 죄의 용서도, 은혜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여도, 말과 생각으로 인한 폭력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고독을 예수님께서는 슬퍼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깊은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강한 연민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는 이 지친 양들을 지키고, 돌보고, 길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이 양들의 목자가 되시기로 결심하신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7-38절).
예수님께서는 지쳐 쓰러진 양들을 찾아 갈릴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만나면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아픔을 치유하셨습니다. 충분히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군중들은 힘을 얻었고, 사회도 어느 정도 좋아졌습니다.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단순한 병의 치유나 가르침만으로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깊은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약해진 양들이 아직도 많이 있어서 그들을 구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오래전에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라고 말씀하시는 “추수”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마지막 날의 수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눈앞에 추수해야 할 사람들은 있고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즉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후 무엇을 하셨는지 보면, 열두 제자들을 뽑아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킨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일꾼”을 양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할 때, 이미 훈련된 목회자나 지도자가 올 것을 기대합니다. 제자들 또한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부에서 일꾼을 데려오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갈 자들을 양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자 바라셨던 것이겠지요.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뽑혀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선교의 사역을,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역을 이러한 나약한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일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거라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계속해서 기도한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추수의 일꾼으로 사용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각자 파견된 곳에서 복음선교의 사역에 종사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