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3月3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3月3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54章 10節
〇讃 頌 讃頌歌 27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7 (四旬節 [4] )
〇讃 頌 讃頌歌 15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9章 27~34節
〇説 教 「神の愛の御業(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3月 3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愛の御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9章 27~38節
先週、「信仰を発揮させよう」という内容でお話を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今日の聖書箇所にも、信仰を発揮し、救われた人が登場します。それは目の見えない二人の人たちでした。27節です。「イエスがそこからお出かけになると、二人の盲人が叫んで、『ダビデの子よ、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言いながらついてきた。」(27節)
当時は、目の見えない人も汚れた者と看做されて、神さまから遠ざけられていました。サムエル記下5章によりますと「目や足の不自由な者は神殿に入ってはならない」とあります。今のように福祉が発達してはおらず、人権意識が普及していない世の中で、障害をもった人々は神さまからも人の社会からも見放された存在でした。
イエス・キリストはそうした人々の希望として世に現れました。この目の見えない人たちは「ダビデの子よ、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びながら、イエスさまの後を家まで追いかけました。「ダビデの子」という呼び方は旧約聖書に約束されたメシアを指しています。この二人にとってイエスさまは神さまから遣わされた救い主でした。神殿での礼拝を通して神さまに近づくことのできない二人は、この時、イエスさまのおられる家で神さまに近づくことが許されました。そして、イエスさまならば癒してくださるに違いないと信じた、その信仰に従って、二人は目を開かれました。
このように、神さまは御子イエス・キリストを世に送られて、御自身の憐れみをお示しになりました。身体の不自由な人々や病を負った人々が特別に救いにあずかったのは、神さまの掟に従い得ず、罪の裁きのゆえに死に定められているすべての人に対する、神さまの憐れみが明らかになるため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世の誰もが神さまに近づ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お方です。救いを求めて近づいてくる誰をも拒むことはなさいません。そして、信じて救いを願うならば、イエスさまは御言葉によって癒してくださいます。その癒しがもつ意味は、罪が赦されて神さまとの関係が正常に回復されて、もはや見捨てられた人間ではなくなるということです。
ただ、この二人の求めに、イエスさまはすぐさま応答され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が滞在する家に着くまで、まるで無視したかのような対応です。それは大勢の群衆の前で癒やしの業を見せますと、それに熱狂した人々によって混乱が起こるのを恐れてのこともあるでしょうし、この二人の信仰が真の信仰なのかどうかを見ておられたのかも知れません。
二人は決して諦め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が滞在する家まで入って行ったのです。そこで初めて、イエスさまはこう言われたのです。「わたしにできると信じるのか。」(28節)。
イエスさまは、無理に信仰を強制することはなさりません。私たち自身が信仰の道へと進まれることを、自分自身で主を求めることを待っておられる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彼らにこう言われました。「わたしにできると信じるのか」、すなわち、私があなたがたの目を癒す、目を見えるようにする、と信じるのか、とお尋ねになりました。
彼らはすぐさま「はい、主よ」(28節)と答えました。これは彼らの信仰告白です。魔術師のような奇跡行為者としてではなく、正真正銘の救い主メシアと信じているのです。
この彼らの信仰にイエスさまがどのように応えられたのかと言いますと、29節です。「そこで、イエスが二人の目に触り『あなたがたの信じているとおりになるように』と言われると、二人は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29-30節)
「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のは、「目が明るくなった」「目が開いた」とも訳される言葉ですが、単に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だけではなく、目の前に救い主の御顔をはっきりと仰ぎ見ることが出来て、本当の意味での人生の夜明けが彼らに訪れたといって良いでしょう。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感動がそこにはあったはずです。
イエスさまの御業は、常に人々の信仰に応えるものとして描かれております。イエスさまは私たちの自由意志を重んじられます。神さまは私たちを促し、励まし、警告を与え、救いに招いておられますが、私たちが自らの意志で、判断し、決断したものが、信仰となって表れるときに、神さまの御業はなされます。今日の聖書箇所では「わたしにできると信じるのか」というイエスさまの問いかけが、一つの促しとなっています。イエスさまは私たちの信仰の発揮を待っておられます。「はい、主よ」という信仰告白を待っておられる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彼らの信仰を受け止めてくださいました。イエスさまを信頼する心、イエスさまに期待し、イエスさまを希望とする心を受け止め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二人の目が見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彼ら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のは、彼らの信仰の力、信心ではありません。主が触れ、主が語られたから見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主の御業が起こったのです。
皆さんには、自分の罪の姿を知って、「わたし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キリストにすがる思いがあるでしょうか。そして、キリストは私の罪のために十字架についてくださり、よみがえってくださった神の救い主である、という告白ができるでしょうか。この四旬節の時、私たちはもう一度自分自身を省みる必要があります。
ところで、彼らは見えるようになって大変喜んだことでしょう。しかし、イエスさまは「このことは、だれにも知らせてはいけない」と厳しくお命じになったと言います(30節)。
それは、先ほども言いましたが、奇跡や癒やしの業に人々が熱狂し、混乱するのを恐れてのことでしょう。そして、イエスさまが人々に伝えたかったことが伝わらなくなってしまうことを恐れてのことでしょう。奇跡や癒やしの業というのは、当事者たちにとっては大変重要なことです。でも、イエスさまが本当に伝えたかったのは、福音なのです。神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いることなのです。奇跡も癒やしも、それは神さまの愛の表れの一つに過ぎないのです。何よりも、神さまはその愛を、ご自分の御子であるイエスさまによって表してくださ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救い主としておいでになりました。私たちを罪と死から救うために十字架の御業をなさいました。私たち教会が伝えることは、このことなのです。
それから、32節以下には、口の利けなかった人が、イエスさまによって癒されて、ものを言い始めた、という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ところが、そのことを聞いた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はこう言っています。「あの男は悪霊の頭の力で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34節)。
先ほどの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人たちとは、まったく正反対の態度です。イエスさまが人々を癒したり、悪霊を追い出したりしても、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は、イエスさまを信じないで、イエスという男は悪霊の力で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と言って、どこまでも、イエスさまを批判するだけでした。
イエスさまが人々を癒されたのは、もちろん、悪霊の力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一つ一つの御業、それは、神さまの愛を表わすためでした。罪に苦しむ人たち、病に苦しむ人たちがイエスさまに出会い、神さまの愛によって救われるためでした。イエスさまは、私たちに出会ってくださいました。イエスさまに出会った私たちは、新たにイエスさまに出会う方があるように祈りつつ、イエスさまを伝えていきましょう。
【2025년 3월 30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마태복음 9장 27~38절
지난 주 “믿음을 발휘하자” 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도 믿음을 발휘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두 맹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27절).
당시에는 맹인(시각장애인)도 더러워진 자로 간주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5장에 따르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복지가 발전하지 않았고 인권의식이 보급되지 않은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인간 사회로부터도 외면 받은 존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희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맹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치며 예수님의 뒤를 집까지 쫓아갔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 두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세주였습니다. 성전에서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이때 예수님이 계신 집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반드시 자신들을 치유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그들의 신앙에 따라 두 사람은 눈은 떠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자신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이 특별히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고, 죄의 심판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누구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을 구하며 찾아오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믿고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 치유가 갖는 의미는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더 이상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두사람의 요청에 즉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치 그들을 무시한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군중 앞에서 치유의 기적을 보이시면, 이에 열광한 사람들로 인해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두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시험하고 계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28절).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믿음의 길을 가기를,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즉, 내가 너희의 눈을 고쳐 보게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바로 “주여 그러하오이다”(28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마술사와 같은 기적행위자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구세주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에 예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냐면, 29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29-30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라는 것은 “눈이 떠지게 되었다”, “눈이 보이게 되었다” 라고도 번역되는 말인데, 이는 단순히 시력을 되찾았다는 의미를 넘어 눈앞에 구세주의 얼굴을 똑똑히 우러러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새벽이 그들에게 찾아왔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이 그 순간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항상 사람들의 신앙에 부응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권면하시고, 격려하시며, 경고를 주시고, 구원으로 부르고 계시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고 결단한 것이 믿음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 믿느냐” 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우리를 믿음으로 나아 가게 하는 하나의 권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을 발휘하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여 그리하오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 예수님께 기대고 예수님을 희망으로 삼는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게 된 것은 그들의 믿음의 힘이나 신앙심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만지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의 모습을 깨닫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그리스도께 간절히 매달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보게 된 후 큰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다고 합니다(30절).
이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적이나 치유의 역사로 인해 사람들이 열광하여 혼란이 생기는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정말로 전하고자 하셨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적과 치유의 역사는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전하고 싶으셨던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적과 치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자신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32절 이하에는 말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4절).
앞서 말한 눈이 보이게 된 사람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거나 귀신을 쫓아내셔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라는 사람이 악귀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며 끝까지 예수님을 비판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은 물론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하나의 기적,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로 고통받는 사람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새롭게 예수님을 만나는 분이 있기를 기도하며, 예수님을 전해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