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2月1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4年12月1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28章 18~20節
〇讃 頌 讃頌歌 2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7 (待降節[3])
〇讃 頌 讃頌歌 10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章 18~25節
〇説 教 「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
(그 이름은 임마누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9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2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章 18~25節
今日の聖書箇所は、ヨセフの苦しむ姿を記しています。ヨセフが苦しんだのは、婚約していたマリアが何者かによって子供を身ごもったことを知ったからです。どのような経緯でヨセフはそのことを知ったのかは記されていません。「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と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は記されていますが、そのことを知っていたのはマリアだけだったはずです。そもそも「聖霊によって身ごもる」なんて人間には理解できない神秘的な事柄です。ヨセフはマリアが身ごもった理由を知らなかったと思います。ですからヨセフは苦しんだのです。
ヨセフは「正しい人であった」と言います。「正しい人」というのは、ユダヤ社会では律法を忠実に守る人のことです。ヨセフは律法に書いてある通りに生きる人であったわけです。律法に照らせば、マリアは姦淫の罪にあたります。石打ちの刑で殺されても仕方ありません。しかし、ヨセフはマリアを守ろうとします。マリアの妊娠を表沙汰にすることなく、密かに離縁しようしました。それは苦渋の決断でした。そうすることで、マリアへの愛と神さまへの愛を貫こうとしたのです。
ヨセフはこの誕生物語以降、聖書に登場しませんので、その人生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のかはよく分かりません。しかし、ヨセフは信仰と実際の生活の中で悩み苦しんだ人だと言えます。そして、その都度、天使のお告げを聞いて、その通りに行動した人です。聖書に記されている天使のお告げは四度ありました。今日の聖書箇所がその最初のものです。二度目はヘロデ大王がエルサレムとその周辺の二歳以下の男の子を殺す前に天使のお告げを聞いてエジプトに逃れて行きます。そしてヘロデ大王が死んだ後に天使のお告げを聞いてエジプトから帰国し、さらに、四度目として、夢で示されてナザレに住むことになるのです。
神さまはヨセフを用いてその救いのご計画を実現されて行きました。ルカによる福音書は受胎告知を告げる天使ガブリエルに対して「わたしは主のはしためです。お言葉どおり、この身に成りますように」(ルカ1:38)と答えるマリアの従順を際立たせていますが、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ヨセフの「従順」を際立たせています。
悩みの中で、神さまの示された御心に、言葉少なではあるけれども忠実に歩むヨセフの姿は、行く先を知らないで神さまの言葉に信頼して旅立ったアブラハムの姿や、燔祭の薪を背負って父アブラハムの後についてゆく従順なイサクの姿と重なります。
ヨセフは生まれた子に「イエス」と名付けます。それは天使のお告げに従ったわけですが、しかし、同時にそれはヨセフの信仰告白でもあったのです。23節に天使がイザヤ書7章14節の御言葉をもってイエスさまの名前の由来を説明していますが、まさに「イエスはインマヌエル」、どのような苦しみや悲しみの中にあっても、「インマヌエル、神は我らと共におられる」という信仰告白です。
20節に「このように考えていると、主の天使が夢に現れて言った」とあります。順序が逆のような気がします。マリアの時のように、先に天使が現れて告げてくれていたら、ヨセフもそんなに悩む必要は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どうして神さま様は先にこのことを教えてくれ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ヨセフにとって考える時、悩み苦しみ時が必要だったのでしょう。思い悩む時があったからこそ、その後、神さまから「恐れず妻マリアを迎え入れなさい」と言われ、その理由が示されたとき、彼はすぐに主に従うことができたのです。
ドイツのルター派の牧師で、20世紀を代表するキリスト教神学者の一人にディートリッヒ・ボンヘッファーという人がいます。ボンヘッファーはナチスに対して抵抗運動をする中で、逮捕され、投獄されます。後に、ヒトラー暗殺計画に加担したことが発覚し、絞首刑となりました。ボンヘッファーはいくつもの「獄中書簡」を残し、それが本となって出版されています。その中の「共に生きる生活」という本の中で、次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
「ひとりでいることのできない者は、交わりにはいることを用心しなさい。」
含蓄のある言葉だと思います。ボンヘッファーは、信仰者がしばしば一人でいることができず、交わりに依存し、あるいは交わりに過剰な期待を抱き、そこに責任を転嫁して、ついにはその交わりにつまずいて、相手を非難して終わっていく私たちの弱さなり、危険性を、このように鋭く突いたのです。
もちろん私たちは交わりを必要とし、誰かの励まし、慰め、共感を必要としてます。しかし、人からの救いを得ようと思っても、人は神さまの代わりには成り得ないので、最後は、一人、神さまの前に立つしかありません。
そのことをボンヘッファーは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
「神があなたを呼ばれた時、あなたはただひとり神の前に立った。ひとりであなたはその召し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ひとりであなたは自分の十字架を負い、戦い、祈らねばならなかった。もしあなたがひとりでいることを望まないなら、それはあなたに対するキリストの召しを否定することであり、そうすればあなたは、召された者たちの交わりとは何の関わりをも持つことはできない。」
大変厳しい言葉です。信仰と現実の社会や生活の間で、悩み苦しんだ人の言葉です。ヨセフも、そうした葛藤の中で一人、悩み苦しみながら、沈黙を守りました。沈黙を守りながら神さまの前に立ったとき、神さまの御心が明らかにされました。20~21節です。
「ダビデの子ヨセフ、恐れず妻マリアを迎え入れなさい。マリアの胎の子は聖霊によって宿ったのである。マリアは男の子を産む。その子をイエスと名付けなさい。この子は自分の民を罪から救うからである。」(20-21節)
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も、一人、沈黙し、神さまの前に立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きがあります。そこでは誰も手を貸すことができません。安易な慰めや励ましも含めて余計な口を差し挟む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しかし、その時、その沈黙の中で、インマヌエルの主が語ってくださいます。ですから、沈黙とはただ言葉を発し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神さまの御言葉を聞くことなのです。
今年のクリスマス、私たちもまたヨセフのように主の御前で静まり、主の御言葉を聞きたいと思います。主なる神さまが語ってくださる約束の御言葉、「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という御言葉と出会い、その御言葉によって慰められ、励まされ、生かされていく。そのようなクリスマスを送らせていただきたいと願います。
【2024년 12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그 이름은 임마누엘”
마태복음 1장 18~23절
오늘의 성경 구절은 요셉의 고통받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요셉이 괴로워한 것은 약혼한 마리아가 누군가에 의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위로 요셉이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마태복음에는 적혀 있지만, 그것을 알고 있던 것은 마리아뿐이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성령으로 임신한다”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이유를 몰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괴로워한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셉은 율법에 적힌 대로 사는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마리아는 간음죄에 해당합니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지키려고 합니다. 드러내길 원하지 않고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괴로운 결단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관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 탄생 이야기 이후 성경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앙과 실제 생활 속에서 괴로워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천사의 신탁을 듣고 그대로 행동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천사의 계시는 네 번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구절이 그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헤롯 왕이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두 살 이하 남자아이를 죽이기 전에 천사의 신탁을 듣고 애굽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헤롯 왕이 죽은 후에 천사의 신탁을 듣고 애굽에서 귀국하여, 네 번째 꿈의 신탁으로 나사렛에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이용하여 그 구원의 계획을 실현해 가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수태 고지를 알리는 천사 가브리엘에 대해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라고 대답하는 마리아의 순종을 돋보이게 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순종을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고민 속에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마음에 말은 적지만 충실하게 걸어가는 요셉의 모습은 행선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떠난 아브라함의 모습과 번제 나무을 지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뒤를 따라가는 순종적인 이삭의 모습과 겹칩니다.
요셉은 태어난 아이에게 “예수”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것은 천사의 말씀에 따른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요셉의 신앙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23절에 천사가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으로 예수님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는 임마누엘”, 어떤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 있더라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20절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서가 반대인 것 같습니다. 마리아 때처럼 먼저 천사가 나타나 아뢰었다면 요셉도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먼저 이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요셉에게 고민하고 괴로워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고민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 후 하나님께서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가 제시되었을 때 그는 바로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 루터교 목사로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회퍼는 나치에 대해 저항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됩니다. 후에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교수형이 되었습니다. 본회퍼는 여러 개의 “옥중 서한”을 남겼고, 그것이 책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함께 사는 생활”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을 수 없는 자는 교제에 들어가는 것을 조심하라.”
함축성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본회퍼는 신앙인이 자주 혼자 있을 수 없고, 교제에 의존하고, 혹은 교제에 지나친 기대를 품고, 거기에 책임을 전가하고, 마침내는 그 교제에 실족하여 상대방을 비난하며 끝나가는 우리의 나약함과 위험성을 이렇게 날카롭게 찌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제를 필요로 하고 누군가의 격려, 위로, 공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구원을 얻고자 해도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혼자서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을 본회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을 때, 당신은 오직 홀로 하나님 앞에 섰다. 혼자서 당신은 그 부르심을 따라야 했다. 혼자서 당신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싸우고 기도해야 했다. 만약 당신이 혼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러면 당신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교제와는 아무 상관도 가질 수 없다.”
굉장히 엄중한 말입니다. 신앙과 현실의 사회나 생활 사이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한 사람의 말입니다. 요셉도 그런 갈등 속에서 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침묵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밝혀졌습니다. 20~21절입니다.
“다윗의 자손 아들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0-21절)
우리 삶에서도 혼자서 침묵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안이한 위로나 격려를 포함해서 쓸데없는 참견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침묵 속에서 임마누엘의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침묵이란 단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맞이하는 성탄절, 우리도 요셉처럼 주님 앞에서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해주시는 약속의 말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과 만나서 그 말씀에 의해 위로 받고 격려 받는 그런 크리스마스를 보내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