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12月3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4年12月2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42編 12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3 (イザヤ 65章)
〇讃 頌 讃頌歌 130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2章 25~32節
〇説 教 「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6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4年 12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
ルカによる福音書 2章 25~32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イエスさまがお生まれになって、少なくとも八日は過ぎた頃、ヨセフとマリアがイエスさまを抱いて、エルサレム神殿へ宮詣でに行きます。その時、老人シメオンと出会った話です。
シメオンという人は、祭司でもなく、律法学者でもなく、預言者でもなく、ただ一介の敬虔な年を取った信徒であったようですが、長い間、「イスラエルの慰められることを待ち望んでいた」人でした。しかし、彼の上には「聖霊がとどまって」おり、また彼は「主、メシア(キリスト)を
見るまでは、決して死なない」と聖霊のお告げを受けており、彼が聖霊に導かれて神殿に入りますと、幼子イエスさまを抱いた両親と出会ったのです。この出会いはまさに聖霊による不思議な神さまのご計画でありました。
シメオンは「私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からです」と言います。この「救いを見た」というのは、頭の中で考えて「救いを理解した」というのではなく、幼子イエスさまを自分の腕に抱いて、その幼子の身体のあの柔らかな感触、ぬくもりを肌で感じ、そして、幼子イエスを自分の目で見て、救いを確信しているのです。すなわち、知的理解を超えたところで、人間の生き死にの根源に触れるような、そういった世界を彼は、この言葉で表現しているのです。
これが、いわゆる「霊的」とか「スピリチュアリティー」とか言うものです。「霊的」とか「スピリチュアリティー」と言いますと、なんか神秘主義になってしまったり、あるいは非常に宗教的な狭い世界での瞑想だとか、祈りに没頭するとか、そういう世界の話のように聞こえますが、そうではありません。もっと現実的な、私たち人間の生と死に関わる問題であるのです。
人間の生と死に関わる内面的な問題(霊的な問題)は、別に宗教に限定されてい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最近では、お医者さんや心理学者、哲学者あるいは生物学者、あるいは社会学者、そういった人たちが非常に学術的なところでスピリチュアリティの問題を取り上げるようになっています。人間の生死に関わる価値観をどのように考えるのか?そう言ったことが、世界保健機構WHOでも取り上げられています。要するに人間が生きたり、死んだりするそういった究極の、いわば人間の根源的なところでは人間の知恵とか力とかを超えたものが要る、それが「霊的」とか「スピリチュアリティー」と言って、新しい社会の中で提唱され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考えてわからないもの、人間の知恵とか力というものが支配するこの世界の外から来る、何か究極的なものが人間には必要なのだということが言われ始めているわけです。
これを教会では、「秘義(サクラメント)」と言います。聖礼典のことです。プロテスタントでは、このサクラメントを洗礼と聖餐式の二つと捉えています。このサクラメントが教会には必要だと考えているわけですね。
もし信仰が考えて分かる事柄の中で完結するのであれば、どれだけ知っているかということで、信仰を測ることができますから、その分かることだけで信仰を測ろうとすれば試験を受ければいいんですね。試験を受けて合格した人が洗礼を受ければいいのです。でも、教会はそんなことはしません。分かろうが分かるまいが、洗礼を受けるわけですね。それは考えても分からない世界を信仰は持っているよということで、しかもそれを大事にしていることですね。
もし、分かって洗礼を受けるとしたら、分かったことしか信じないことになりますから、その信仰というのは、大変つまら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す。洗礼というのは、分からないことをも含めて信仰の世界ですから、分からないことを含めて広い形で救いと言うものが、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今日、このような話をするのは、毎年クリスマス時期にはクリスマスに関連する説教をしていますが、クリスマスの物語自体は、よく知っています。その意味するところもよく分かっているかと思いますが、私は毎年、説教準備する中で、感じるのは、どんどん疑問に思う、分からないところが増えてくるということです。
サクラメント、サクラメンタルな部分が多いということです。でも、このサクラメンタルな部分というのは、教会の中だけでの言葉だったのが、今では、先ほども言いましたように、現代社会の中、教会の外の世界でも使われるようになり、その必要性が叫ばれているわけです。そういう時代になっているのです。
と言うことは、クリスマスを教会の中だけのもの、世間で言うクリスマスは偽物で、教会のクリスマスだけが本物だと言えないということです。教会はもっと目を外に向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教会の新しい役割というものを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わけですね。
今日の聖書箇所にあるシメオンの言葉は、そのヒントを与え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というのは、分からないけれども、しかし、わたしの体の感触と私の目で見たところでこの救いというものを受け取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考えて分かる世界でないところで救いというものを受け取ったわけですね。
そのことが、マリアに語ったシメオンの言葉の中に現われます。「御覧なさい。この子はイスラエルの多くの人を倒したり、あるいは、立ち上がらせたりするためにと定められ、また、反対を受けるしるしとして定められています。あなた自身も剣で心を刺し貫かれます」とこういうことをマリアに言っています。
生まれて間もない赤ん坊を抱いたマリアにこんな不吉なことを言うわけですが、私たちは、これが十字架の死を預言したもの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いますから、そんなに驚かないわけですが、ここで重要なのは、この赤ん坊が成長し、十字架で死ぬ、その死にシメオンは「救い」、自分の救いを見ていることです。
そして、この十字架の死、痛ましい、その悲劇的な出来事こそが人間にもっとも喜びを与える出来事であることを告白していることです。
シメオンは、幼子イエスさまを見て、「この子はこれから成長して、人々に教えを宣べ伝えられて、だんだん偉くなっていく」とは言っておりません。「この子は十字架で死ぬ」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単にこの幼子イエスさまが悲劇の死を遂げるお方であるという事だけを告げたのではなくて、その出来事によって救いが成し遂げられて、救いが完成する。だから私たちにとって喜びと慰め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シメオンは、幼子イエスさまを見て、そして、抱きながら、神さまの壮大な救いの計画を見て取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こそシメオンは「この僕を安らかに去らせてくださいます」という告白をしたのだということです。
これはシメオンが頭の中で捉え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幼子イエスさまを抱いたときに、体で、心で感じ取ったことなのです。
私たちも、頭の中で信仰を考えるのではなくて、もっと霊的に、スピリチュアルに物事を捉えて、クリスマスの喜びを味わいたいと思うの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を信じ、心に受け入れ、従って歩む者は、主にある平安と祝福の中で歩むことができます。地上の人生が終わるときも、祝福の中で、御国へ移されるのです。
今年一年を振り返りその恵みを数え、主に感謝し、新しい年を迎えましょう。シメオンのように主にお会いできた恵みを覚え、感謝と喜びをもって主を讃美しつつ、新たな歩みをなして行きましょう。
【2024년 12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
누가복음 2장 25~32절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적어도 8일은 지났을 무렵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참배하러 갈 때, 노인 시므온과 만난 이야기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제사도 율법학자도 선지자도 아닌 그저 일개의 경건하게 나이를 먹은 신도였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령이 계시고”, 또한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의 말씀을 받았고, 그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부모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은 바로 성령에 의한 이상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구원을 보았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구원을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팔에 안고서 그 아기 몸의 부드러운 감촉, 온기를 피부로 느끼고,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구원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즉, 지적 이해를 넘어서 인간 생사의 근원에 존재하는 세계를 그는 이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영적” 또는 “스피리츄얼리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또는 “스피리츄얼리티”라고 하면 뭔가 신비주의를 연상하든지, 아니면 매우 종교적인 좁은 세계에서의 명상, 기도에 몰두하는 것 같은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내면적인 문제(영적인 문제)는 따로 종교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의사나 심리학자, 철학자 혹은 생물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굉장히 학술적인 곳에서 스피리츄얼리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에 관련된 가치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말들이 세계 보건 기구 WHO에서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이 살거나, 죽거나 하는 그런 궁극의, 말하자면 인간의 근원적인 곳에서는 인간의 지혜라든가 힘 같은 것을 초월한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을 “영적” 또는 “스피리츄얼리티”라고 해서, 새로운 사회 속에서 제창되고 있습니다.
생각해서 알 수 없는 것, 인간의 지혜라든가 힘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이 세계 밖에서 오는, 뭔가 궁극적인 것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비의(새크라멘트)”라고 합니다. 성례전을 말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새크라멘트를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새크라멘트가 교회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신앙이 생각해서 알 수 있는 일 중에서 완결된다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신앙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아는 것만으로 신앙을 측정하려면 시험을 보면 됩니다. 시험을 쳐서 합격한 사람이 세례를 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알든 모르든 세례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해도 모르는 세계를 신앙은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그것을 소중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알고 세례를 받는다면 알게 된 것밖에 믿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때의 신앙이라는 것은 매우 하찮은 것이 되고 맙니다. 세례라는 것은 모르는 것을 포함한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포함한 넓은 형태의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매년 크리스마스 시기가 다가오면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설교를 하게 되는데, 여러분도 크리스마스 이야기 자체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의미하는 바도 잘 알고 있겠지만, 제가 매년 설교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점점 의문이 들고 모르는 것이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새크라멘트, 새크라멘탈한 부분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이 새크라멘탈한 부분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만 사용하던 표현이었는데, 지금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현대 사회에서는 교회 바깥 세상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그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크리스마스는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이고, 세상에서 말하는 크리스마스는 가짜이며 교회의 크리스마스만이 진짜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눈을 좀더 밖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은 그 힌트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내 몸의 감촉과 내 눈으로 봄으로서 구원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생각해서 알 수 있는 세상이 아닌 곳에서 구원이라는 것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한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새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라는 말을 마리아에게 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이런 불길한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놀랍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기가 자라나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데 그 죽음에서 시므온은 “구원”, 자신의 구원을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 안타까운 그 비극적인 사건이 오히려 우리 인간에게 가장 기쁨을 주는 사건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성장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점점 더 잘나간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이 아기 예수님이 비극의 죽음을 당하는 분이라는 것만 고한 것이 아니라 그 일로 구원이 이루어지고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리고 안아보고서 하나님의 장대한 구원의 계획을 간파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므온은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시므온은 머릿속에서 이것을 포착한 것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었을 때 몸으로, 마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우리도 머릿속으로 신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영적으로, 스피리츄얼리티의 영적으로 사물을 포착하고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맛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고, 따라서 걷는 자는 주 안에 있는 평안과 축복 속에서 걸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삶이 끝날 때도 축복 속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고 그 은혜를 헤아리며 또 주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해를 맞이합시다. 시므온처럼 주님을 뵙게 된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걸음을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