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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1月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月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7章 7~8節
〇讃    頌    讃頌歌 8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 (詩編 1編)
〇讃    頌    讃頌歌 55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8章 1~4節
〇説   教    「神の意志と私の意志が触れ合うとき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맞닿을 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6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月 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意志と私の意志が触れるとき」
                 マタイによる福音書 8章 1~4節


 昨年、クリスマス前に、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ある「山上の説教」(5~7章)を読み終えましたが、今日の聖書箇所は、その後の物語です。1節です。「イエスが山を下りられると、大勢の群衆が従った。」
 イエスさまの行くところは、人だかりとなりました。そこに、イエスさまのうわさを聞きつけて、一人の男性が近づいて来ました。その人は「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でした。


 「重い皮膚病」というのは、韓国語聖書では「나병환자(ハンセン病患者)」と訳されています。以前の日本語聖書でも「ハンセン病(ライ病)」と訳されていましたが、今では、この病気はハンセン病ではなく、何か特異な病気であったと推測されています。ハンセン病というのは、文献上において紀元前6世紀から登場し、それ以前にはない病気です。しかし、ここで言われている重い皮膚病は、紀元前1500年頃、モーセの時代にすでに言及されている病気です。病状の違いとしては、ハンセン病は神経麻痺がありますが、ここで言われている病気には神経麻痺はなかったようです。ただ、この病気がハンセン病でなかたとしても、昔の「ライ予防法」のように、不治の病で、隔離され、彼らの住居は町や村の外と決められていました。その理由は接触すると感染するというだけでなく、宗教上、彼らは汚れた者と見なされ、社会的に疎外されていたからです。
 彼らは一般の人が自分に近づいて来たら「わたしは汚れた者でございます。離れてください」と叫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この病気は罪を犯した者が神さまに呪われて発症する病だと考えられていました。そのため、この病気に罹ると、治る見込みもないし、汚れた者として隔離され、神さまにまで見捨てられた存在として人から嫌われて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孤独の中、希望を失って生きていた人が多かったと思います。しかし、ここにイエス・キリストに希望を見いだした人がいたのです。


 彼は人からの非難を浴びようが、自らイエスさまに近づきました。イエスさまだったら赦してくださり、病を癒やしてくださるという信仰がありました。それが彼の言葉によく表れています。「主よ、御心ならば、わたしを清く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ります。」(2節)
 通常、病の癒しを願う場合、「わたしに手を置いて治してください」と願いました。それが彼は「御心ならば、わたしを清く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ります」と言いました。ここには、イエスさまを「主よ」と神さまへの信頼とともに、汚れた自分が神さまに「わたしに手を置いて」などと願えるはずはないという謙遜な思いがありました。それでもイエスさまに最後の願いとして「御心ならば」と、「あなたがそうお望みならば」とイエスさまの憐れみに自分の人生をかけたのです。


 その彼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手を差し伸べてその人に触れ」(3節)ました。何気なく、当たり前のように書かれている言葉ですが、この「触れる」という行為にどれほどの意味と思いが込められているでしょうか。
 イエスさまが彼に触れるということは、イエスさまも汚れた者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社会から隔離されることを意味しました。ですから、強い意志なしにはできないことです。律法に立ち向かう強さ、病を恐れぬ勇気、そして相手に寄り添おうとする愛、この意志がなければ決してできないことです。


 ところで、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は、イエスさまに、「主よ、御心ならば、わたしを清く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ります」(2節)と話しかけました。果たして、これは“願い”と言えるでしょうか。先ほど、謙遜な思いからと言いましたが、ただそれだけの意味だろうかと何度も考えました。なぜなら、大勢の人たちの非難をも恐れず、勇気を持ってイエスさまに近寄って来たのですから、「主よ、癒やしてください」とストレートに願っても良かったはずです。不思議に思います。
 そこで「御心ならば」という意味を調べ直しました。すると、この「御心ならば」という言葉は、韓国語聖書に「원하시면(願うならば)」と訳されているように、イエスさまの意志を問うような言葉なのです。それを簡単に言いますと、「癒やす気持ちがありますか?」ということですね。それを人間であるイエスさまに言うということは、「主イエスよ、あなたには律法に立ち向かう気骨はありますか?重い皮膚病に触れる勇気はありますか?私に寄り添ってくださる愛はありますか?」と、その意志を問うている言葉なのです。


 そこには、イエスさまに対する信仰があり、謙遜な思いもあるのですが、それ以上に、絶対的な信頼をイエスさまに向けて、だからこそ、遠慮なく、律法を破って、必死の思いで、イエスさまに激しく迫っているのです。それ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よろしい。清くなれ」(3節)と答えました。
 「よろしい」、「わたしは願う」と、イエスさまは確固たる意志を持ってお答えになりました。「病を恐れず、律法に違反しても、あなたを癒す。わたしはあなたを愛する。父なる神によって造られた、大切な一人の“人”として愛する」というイエスさまの意志がこの「よろしい」という言葉に込められているのです。愛の意志です。


 イエスさまが愛を込めて、癒しの意志をもって、彼に触れたことによって、その人の重い皮膚病は癒されました。けれども、そこにあったのはイエスさまの意志、イエスさまの愛だけだったのでしょうか。
 そうではないと思います。そこには、重い皮膚病の人の意志が間違いなくあったはずです。イエスを信じる信仰と、何としても癒されたいという願い、その意志があったはずです。
 この癒しは、イエスさまが山の上で、弟子たちや群衆を教え、それを終えて山を下りて来た最初に起こった出来事です。山の上でイエスさまは、「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る。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つかる。門を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る」(7章7節)と教えられました。重い皮膚病の人は山の上にはおりませんでしたが、まさにその教えを実行するかのようなこの人の意志に、イエスさまもまた意志をもって、愛をもってお応えになったのです。


 私たちは日常生活の中で、自分にしろ他人にしろ「本人がその気にならなければ、何も起こらない」と言います。意志のないところに奇跡は起こりません。喜びは生まれません。感謝は湧き上がりません。私たちの信仰と求める意志とそれに応える神さまの愛の意志、この二つが出会う時、そこには何かが起こります。何かが与えられます。実際の癒しではないかも知れませんが、何かを見つけ、その時、私たちの心の目は開かれ、人生の扉が新しい世界、新たな生き方へと開かれます。
 皆さん、信仰を通して、神さまに求める意志はあるでしょうか。この新しい年、私たちは信仰の確固たる意志をもって、神さまに求め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その意志に、神さまは必ず、愛の意志で応えてくださいます。


【2025년 1월 5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맞닿을 때”
                                마태복음 8장 1~4절


 작년 크리스마스 전에 마태복음에 있는 “산상 수훈”(5~7장)을 다 읽었는데, 오늘의 성경 부분은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 사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심한 피부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어 성경에서는 “나병환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전의 일본어 성경에서도 “나병”으로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이 병이 나병이 아니라 뭔가 특이한 악성 피부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나병(한센병)이라고 하는 것은 문헌상에서 기원전 6세기부터 등장하고, 그 이전에는 없는 병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심한 피부병은 기원전 1500년경 모세의 시대에 이미 언급된 질병입니다. 병세의 차이로는 한센병은 신경 마비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질병에는 신경 마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병이 한센병이 아니더라도 예전의 “라이 예방법”처럼 불치병으로 격리되어 그들의 거처는 마을 밖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접촉하면 감염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상 그들은 더러운 자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반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면 “나는 더러운 사람입니다. 떠나 주세요”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 병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발병하는 병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리면 나을 가망도 없고 더러운 자로 격리되어 하나님께까지 버림받은 존재로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고독 속에서 소망을 잃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찾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의 비난도 주저하지 않고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용서해 주시고 병을 치유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절)
 보통은 병의 치유를 원할 경우, “내게 손을 대고 치료해 주십시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을 “주여” 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더러워진 자신이 하나님께 “내게 손을 대주세요” 라고 바랄 수는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마지막 소원으로 “당신께서 원하시면”이라며 예수님의 연민에 자신의 삶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무심코 당연하다는 듯이 쓰여 있는 말이지만, 이 “대다” 라는 행위에 어느 정도의 의미와 마음이 담겨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신다는 것은 예수님도 더러운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의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에 맞서는 강함,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상대에게 다가서는 사랑, 이 의지가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것은 “소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까 겸손한 마음에서라고 했지만, 그저 그것만의 의미일까? 하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예수님께 다가왔으니, “주여, 치유하소서” 라고 직설적으로 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시면”이라는 뜻을 다시 연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원하시면”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뜻을 묻는 듯한 말입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치유할 마음이 있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이신 예수님께 말씀드린다는 것은 “주 예수님, 당신께서는 율법에 맞설 기골이 있으십니까? 나병환자에게 손을 댈 용기가 있습니까? 저에게 다가오실 사랑이 있으십니까?” 라고 그 뜻을 묻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겸손한 마음도 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예수님께 향하게 하고, 그렇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율법을 어기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에게 강하게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절)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나는 원한다”고 예수님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대답하셨습니다.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율법을 위반해도 당신을 치유하겠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소중한 한 사람의 사람으로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뜻이 이 “원하노라” 라는 말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담아 치유의 의지로 그에게 닿음으로써 그 사람의 나병은 치유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사랑뿐이었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나병환자의 뜻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과 어떻게든 치유받고 싶은 소망, 그 의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치유는 예수님꼐서 산 위에서 제자들과 무리를 가르치고 그것을 마치고 산을 내려온 최초로 일어난 일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7장7절)고 가르쳤습니다. 나병환자는 산 위에 없었지만, 바로 그 가르침을 실행할 것 같은 이 사람의 의지에 예수님도 의지로, 사랑으로 보답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든 남에게든 “본인이 의욕적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지가 없는 곳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쁨은 생기지 않습니다. 감사는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구하는 의지와 그에 보답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 이 둘이 만날 때 거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다. 뭔가가 주어집니다. 실제 치유는 아닐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때 우리 마음의 눈은 열리고 삶의 문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열립니다.
 여러분,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구할 의지가 있습니까? 이 새로운 해, 우리는 신앙의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찾아갑시다. 그 의지에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의 의지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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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1月0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