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1月1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月1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書(로마서) 7章 7~8節
〇讃 頌 讃頌歌 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 (詩編 3編)
〇讃 頌 讃頌歌 368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8章 5~13節
〇説 教 「ただ、ひと言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ただ、ひと言、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8章 5~13節
イエスさまの言葉には権威がありま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7章25~26節に、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いた人々の反応が記されています。「イエスがこれらの言葉を語り終えられると、群衆はその教えに非常に驚いた。彼らの律法学者のようにではなく、権威ある者としてお教えになったからである。」(7:28-29)
今日の聖書箇所には、イエスさまの言葉の中に、「権威ある者」と認め、その権威を信じた人が登場します。それがローマ軍の百人隊長です。
物語の舞台は、ガリラヤ地方にあるカファルナウムです。カファルナウムは、決して大きくはない町でありますが、ローマ軍が駐屯していることから、この地域の重要都市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そこに駐屯していたローマ軍の百人隊長が、イエスさまに近づいて来て懇願しました。「主よ、わたしの僕は中風で家に寝込んで、ひどく苦しんでいます。」(3節)
百人隊長は、部隊の中核をなす立場で重要なポジションにありました。軍全体から見れば、それほど高い地位(階級)ではありませんが、百人隊長はローマ市民権を持ち、部隊の兵士を訓練し、統率する。戦争がないときには、その町の治安を守る重要な役割を担い、規律を守らない兵士を死刑にすることが出来る権威をも持っておりました。そのため、ユダヤ人から見れば、百人隊長というのは、絶大な権威をもった人物でありました。そのような権威を持つ百人隊長がどこの馬の骨ともわからないイエスさまに最大の敬意をもって近づいて来て懇願している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は自分たちの信仰に誇りを持ち、武力で支配するローマ人を心の内では異邦人として軽蔑し、その上早く出て行って欲しいと思っていました。そのことは百人隊長もよく分かっておりました。ですから、ローマ兵として百人隊長は、弱さを見せず、威圧的に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です。それなのに、百人隊長は、僕のために、一切のプライドを捨てて、イエスさまの前に頭を下げたのです。
百人隊長の僕は、「中風のために、ひどく苦しんでいる」と言います。「中風」というのは、脳卒中や脳血栓などによって突然倒れ、半身不随になったり、麻痺や言語障害などの後遺症が残る病気の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は律法が定める汚れなど一切に気にせず、イエスさまに願い求める人のその意志に、勇気と愛の意志で応えようとされます。7節です。「わたしが行って、いやしてあげよう。」
先週、お話しましたが、確固たる信仰をもってその意志を神さまに示すときに、神さまは愛の意志をもって応えてくださいます。
しかし、百人隊長はそれを断るのです。その理由が8節に記されています。「あなたを自分の屋根の下にお迎えできるような者ではありません。」(8節)
ユダヤ人の律法では、神さまを信じていない異邦人と接触したらユダヤ人は汚れた者となり、一定の清めの期間が過ぎるまでは、通常の生活ができませんでした。百人隊長はユダヤ人たちの信仰をよく理解していました。ローマ人である自分がユダヤ人たちが信じる神さまの恵みを受けるには相応しくないというのも分かっていたのです。だから、彼は「ただ、ひと言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わたしの僕はいやされます」と言います。
そして、「権威」の力について語ります。それが9節です。「わたしも権威の下にある者ですが、わたしの下には兵隊がおり、一人に『行け』と言えば行きますし、他の一人に『来い』と言えば来ます。また、部下に『これをしろ』と言えば、そのとおりにします。」(9節)
だから、「ひと言、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と。百人隊長はイエスさまを神さまの権威の下にある存在だと認め、信じているのです。その権威によってイエスさまが命じさえすれば、病さえも服従し、その人から離れ去り、僕は癒やされると言うのです。ローマ軍の百人隊長が、イエスさまの権威はこの世を統治する神さまの権威だと信じているのです。
ここで改めて「権威」について考えて見たいと思いますが、権威という言葉を辞書で調べてみますと、「他の者を服従させる威力」と説明されています。簡単に言えば、言うことを聞かせる力です。
ところで、権威にも2種類あると思います。それは、命じられた人が喜んで従う権威と、嫌々ながら仕方なく従う権威です。例えば、会社には会社を統率する組織の権威(命令系統)がありますが、上司が部下に何か仕事を命じた時、その上司が尊敬され、親しまれている人物であれば、部下は素直にその言葉に聞き従うでしょう。けれども、もしも尊敬のできない嫌な上司であれば、嫌々従うことになるでしょう。その気持は反抗的な態度や言葉になって出るかも知れません。
イエスさまが持っている神の権威も、この世を治める大きな力である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けれども、その力が、私たちの気持を汲もうとせず、私たちの言葉に耳を傾けず、正論を押し付けてくるような、あるいは無理を強いるような権威であるならば、私たちは尊敬し、親しみ、喜んで、イエスさまの言葉に聞き従う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
イエスさまの言葉に、本当の意味で権威があるとしたら、それは「愛」の伴っている権威だ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言葉である祈りを聞き、私たちの気持を汲み取ってくださり、イエスさまが私たちに寄り添ってくださるからこそ、私たちはイエスさまの愛を信じ、イエスさまの言葉に耳を傾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の言葉を信頼し、イエスさまの言葉に勇気をもらって、自分の人生を捉え直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つまり、「愛」こそ、イエスさまの権威の基(もとい)なのです。
権威とはそういうものだと思います。人がその権威に温かさを感じる。暖かい愛を感じて、尊敬し、慕われるのでなければ、本当の意味での権威とは言えません。力と正しさでは、人は心を開きません。
百人隊長は、イエスさまに心を開きました。それは、先週の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がイエスさまに癒されたことを聞いていたからかも知れません。その癒しを通して、権威主義的な律法学者の教えに反対する強さを、病を恐れぬ勇気を、苦しむ人、求める人に寄り添う愛の意志を感じ取ったからかも知れません。イエスさまの温かさに心が触れたからかも知れません。
「帰りなさい。あなたが信じたとおりになるように。」(13節)
私たちは今、直接、イエスに会うことはできません。でも、イエスさまの「ひと言」を信じましょう。「信じたとおりになる」という「ひと言」に込められた愛の権威を信じましょう。自分の願い通りにはいかないかも知れませんが、神さまは、愛を込めた願いには必ず愛をもって応えてくださいます。
「あなたが信じたとおりになるように。」皆さん、本当に信じている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の言葉、神さまの言葉は、必ず現実となります。成就するのです。御言葉の約束を心に握りしめて、待ち望みましょう。
【2025년 1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마태복음 8장 5~13절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5~26절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7:28-29)
오늘 성경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권위 있는 자”로 인정하고 그 권위를 믿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로마군의 백부장입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갈릴리 지방에 있는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결코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중요한 도시였다고 생각됩니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간구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3절)
백부장은 부대의 핵심을 이루는 입장에서 중요한 포지션에 있었습니다. 군 전체로 보면 그리 높은 지위(계급)는 아니지만, 백부장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부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통솔하였습니다. 전쟁이 없을 때에는 그 마을의 치안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규율을 지키지 않는 병사를 사형시킬 수 있는 권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보기에 백부장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권위를 가진 백부장이 어디서 온 어떤 태생의 사람인지도 알 수 없는 예수님께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다가와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무력으로 지배하는 로마인을 내심 이방인이라 경멸했으며, 게다가 빨리 나가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은 백부장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병으로서 백부장은 나약함을 보이지 않고 위압적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하인을 위해 일체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중풍병 때문에 몹시 괴로워한다고 말합니다. “중풍병”이라고 하는 것은 뇌졸중이나 뇌혈전 등에 의해 갑자기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거나 마비나 언어장애 등의 후유증이 남는 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정하는 더러움 따위는 일체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께 소원을 구하는 이의 그 의지에 용기와 사랑의 의지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7절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지난 주에 말씀드렸지만 확고한 믿음으로 그 의지를 하나님께 보여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의지로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가 8절에 적혀 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8절)
유대인의 율법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 접촉하면 유대인은 더러운 자가 되어 일정한 정화기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자신이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권위”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게 9절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절)
그래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권위에 따라 예수님이 명령하기만 하면 병마저 복종하고, 그 사람에게서 떠나 하인은 치유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군의 백부장이 예수님의 권위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권위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권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만, 권위라는 말을 사전에서 알아보면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위력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말에 복종시키는 힘입니다.
그런데 권위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명령받은 사람이 기꺼이 따르는 권위와 마지못해 따르는 권위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에는 회사를 통솔하는 조직의 권위(명령계통)가 있는데, 상사가 부하에게 무언가 일을 명했을 때, 그 상사가 존경받고 친숙한 인물이라면, 부하는 순순히 그 말을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존경할 수 없는 싫은 상사라면 마지못해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 기분은 반항적인 태도나 말이 되어 나올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권위도 이 세상을 다스리는 큰 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힘이 우리의 마음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정론과 무리를 강요하는 권위라면, 우리는 존경심과 친근함을 느끼며 기꺼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진정한 의미의 권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있는 권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우리의 말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삶을 다시 포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야말로 예수님 권위의 바탕입니다.
권위란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이 그 권위에 따뜻함을 느낀다.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의 권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힘과 올바름으로 사람은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지난주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치유되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치유를 통해 권위주의적인 율법학자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강함을,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고통받는 사람,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의지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따뜻함에 마음이 닿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13절)
우리는 지금 직접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읍시다. “믿은 대로 된다”는 “말씀”에 담긴 사랑의 권위를 믿읍시다. 자신의 소원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담은 소원에는 반드시 사랑으로 응해 주십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여러분, 정말 믿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현실이 됩니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약속을 마음에 꼭 쥐고 기다려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