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1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53章 4~5節
〇讃 頌 讃頌歌 1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5 (詩編 8編)
〇讃 頌 讃頌歌 15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8章 14~17節
〇説 教 「癒やされ、仕える
(고치심을 받고 섬긴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3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癒やされ、仕える」
マタイによる福音書 8章 14~17節
今日の聖書箇所の舞台は、カファルナウムにある「ペトロの家」(14節)です。ペトロはもともとベトサイダで漁師をしていて、家もそこにありました。それがイエスさまと出会い、イエスさまの召しを受けて、すべてを捨ててイエスさまに従いました。仕事も家族も、みんな捨ててイエスさまに従うことは、信仰的には素晴らしいことかも知れませんが、私たちは本当にそれで良いのだろうかと思います。残された家族の事が心配です。でも、イエスさまはそこにも配慮されていたのでしょう。具体的なことは、聖書に記されていませんので、詳しくは分かりませんが、恐らくペトロの家族もイエスさまに従うペトロの後を追って来たのでしょう。カファルナウムは、ベトサイダの隣町ですが、イエスさまがガリラヤで活動している時期の拠点となっておりました。そのため、ペトロは家族をカファルナウムに呼び寄せたのかも知れません。そのペトロの家族をイエスさまが大事にしないわけがありません。
イエスさまは誰かにペトロの姑が高熱を出して寝込んでいるのをお聞きになってペトロの家に行かれたのかも知れません。当時の医療では高熱は死に直結する病状です。一大事です。そのため、イエスさまはペトロの家に行かれたのでしょう。イエスさまはペトロの家に行きますと、寝込んでいる彼女の手に触れました。すると、15節です。「熱は去り、しょうとめは起き上がってイエスをもてなし」ました。
ここでまず、イエスさまの行為に注目したいと思います。「イエスがその手に触れられる」という行為は、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の癒やしのときのように、「触れる」ということが強調されています。律法の規定には、熱病に冒された者に触れることは禁止されていました。そして、この日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1章21~31節を読みますと、安息日であったようです。病気の治癒は安息日に禁じられている仕事でした。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安息日にペトロの姑を癒やしたことになります。ここにも、イエスさまの愛、社会的偏見や病など恐れないイエスさまの意志というものが現れています。
この癒やしの奇跡を通して、ペトロも改めて慰められ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恐らく、仕事を捨ててイエスさまに従うペトロの姿を見て、姑はイエスさまに対し、複雑な思いがあったことでしょう。そのことが、ペトロにとっても心の負担でありま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はペトロの家の客となられました。そして、ペトロの姑の病を癒し、ペトロの家に祝福を届けてくださいました。主は主に従う者の家族をも顧みてくださいます。神の国とその義を第一とする者の必要に、主は必ず応えてくださるのです。
さて、イエスさまによって病を癒されたペトロの姑は、その後、どうしたかと言いますと、15節ですね。「しゅうとめは起き上がってイエスをもてなした。」(15節)
何と彼女は起きてイエスさまをもてなし始めました。病み上がりで体力を消耗しきっていただろうに、癒された喜びの方が大きく、彼女はイエスさまをもてなし始めたのです。
彼女は自分の病を癒や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に感謝のしるしとしてイエスさまをもたなしのでしょうが、ただ、それは一時のことではなかったと思います。自分の命を救っ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に、今までは疑心暗鬼のところがあったものが、はっきりとイエスさまが救い主だという確信をもっ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つまり、彼女は神さまに仕える人になった、また、それが彼女の人生における最大の喜びと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の喜びとは、どんな喜びでしょうか。それは神さまと人とに仕えることのできる喜びです。自分を愛して下さった方に、自分も愛をもって応えることのできる喜びです。私たちのために十字架にかかり命をささげて下さったイエスさまに、私たちも心からお仕えすることができます。それは私たちにとっての特権であり大きな喜びです。それが私たちの人生の第一の目的となるのです。
ペトロの姑のように私たちも、イエスさまに喜んでいただけるように、心からお仕え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それから、夕方になりますと、悪霊に取り憑かれている人や病人たちが大勢イエスさまのもとに来ました。聖書はそれを当たり前のことのように「イエスさまは言葉で悪霊を追い出し、病人を皆いやされた」(16節)と記しています。
ここでもイエスさまの言葉の権威が悪霊や病を負いだしたことが語られていますが、ここにイエスさまのどれほど大きな犠牲が伴っていたのか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淡々と、これらのことがイザヤ預言の成就であることを宣言しています。17節です。「彼はわたしたちの患いを負い、わたしたちの病を担った。」(17節)
この言葉は、イザヤ書53章4節の引用ですが、イザヤ書にはこうあります。「彼が担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病/彼が負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痛みであったのに/私たちは思っていた/神の手にかかり、打たれたから/彼は苦しんでいるのだ、と。/彼が刺し貫かれたの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であり/彼が打ち砕かれたのは/わたしたちの咎のためであった。/彼の受けた懲らしによって/わたしたちに平和が与えられ/彼の受けた傷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いやされた。」(イザヤ53:4-5)
マタイによる福音書は、イザヤの言葉を用いて、イエスさまこそ、イザヤが預言したあのメシア、救い主であることを宣言しております。つまり、イエスさまによってなされた癒しの御業は、この地上に神の国が到来したことのしるしであると、ここで証しし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言葉の権威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病を癒してくださいました。当時の社会の中にあって困窮している人々、絶望している人々にご自身を現わされました。イエスさまの神の力を考えるならば、それは当然のように思えるかも知れませんが、そこには、イエスさまの大きな犠牲があったことを私たちは忘れてはいけません。
先ほどのイザヤ書53章4節に「彼が担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病/彼が負ったのはわたしたちの痛みであったのに」とあったように、悪霊に取り憑かれた人や病人たちの痛み・苦しみをイエスさまが負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
人の病を敢えて負いたいと願う人は、普通はいないと思います。しかし、そんな私たちでも自分の最も大切にしている人、愛している人が病に苦しんでいるのを見たら、その病を代わってあげたいと願う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は私たちを愛するが故に、私たちの病を負われました。その時に伴う苦しみや悩み、そこで受ける辱めのいっさいを、イエスさまは担って下さったの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おられることのしるしなのです。
私たちはこのキリストの救いの御業に対して、どのようにお応えしていったら良いでしょうか。ペトロの姑は癒やされた後、キリストに仕えました。彼女はキリストの恵みを覚えてそうせずにはおれませんでした。仕えること、奉仕の形というのは様々であっても、その奉仕が誰のためにするのかということは同じです。主のために、キリストのためにすることです。奉仕の動機がキリストの恵みであるならば、奉仕そのものも恵みであるのです。
2025年度の教会標語は、来週行われる公同議会で決定されますが、仕えること、奉仕することを目標に掲げております。私たちが仕えることを通して、病に苦しんでいる人々や、愛する人を失った人々に、そこに共におられるイエスさまの御臨在が現わさせることが、もしできるならば、そこがどれほど慰めと喜びに満たされることでしょうか。
皆さん、今年一年、イエスさまの愛に応えて、熱情をもって、主に仕え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1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고치심을 받고 섬긴다” 마태복음 8장 14~17절
오늘 성경 부분의 무대는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14절)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벳새다에서 어부를 하고 있었고, 집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일도 가족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신앙적으로 보면 훌륭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지 의문이 듭니다. 남겨진 가족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에도 배려를 하셨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베드로의 가족도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버나움은 벳새다의 이웃 마을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기의 거점이 된 곳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족을 가버나움으로 불러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베드로의 가족을 예수님이 소중히 여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듣고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의료 상황에서 열병은 죽음과 직결되는 병세입니다. 중대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가자 몸져 누운 그녀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러자 15절입니다.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여기서 먼저 예수님의 행위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의 손을 만진다”는 행위는 나병황자의 치유 때처럼 “만지셨다(대셨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율법의 규정에는 열병에 걸린 사람을 만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은 마가복음 1장 21~31절을 보면 안식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병의 치유는 안식일에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도 예수님의 사랑, 사회적 편견이나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님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치유의 기적을 통해 베드로도 다시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며 장모는 예수님에 대해 착잡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도 마음의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 손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치유하고 베드로의 집에 축복을 보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가족도 보살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의 필요에 주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병을 치유 받은 베드로의 장모가 그 후 어떻게 했는지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15절)
그녀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병후에 체력을 다 소모해서 힘이 들텐데도 치유된 기쁨이 더 컸기에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예수님을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을 대접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단지 그때만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대해 지금까지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즉,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으며, 또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기쁨이란 어떤 기쁨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기쁨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신 분께 자신도 사랑으로 보답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목숨을 바쳐주신 예수님을 우리도 진심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특권이자 큰 기쁨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첫 번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처럼 저희도 예수님께 기뻐하실 수 있도록 진심으로 섬겨 나갑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귀신 들린 사람이나 병든 자들이 많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니”(16절) 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귀신이나 병을 쫓아내신 것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의 얼마나 큰 희생이 뒤따랐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담담하게 이 일들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17절)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 4절의 인용인데 이사야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4-5)
마태복음은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시야말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구세주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행하신 고치심의 일은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기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권위에 따라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의 사회 속에서 곤궁한 사람들,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예수님의 큰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까 이사야서 53장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라고 쓰여 있었듯이 귀신 들린 사람이나 병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예수님께서 짊어지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굳이 짊어지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라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병으로 고통받는 걸 보면 그 병을 대신해 주고 싶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병을 지셨습니다. 그 때 수반되는 고통과 고민, 거기서 받는 모욕의 일체를 예수님께서는 맡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 나가야 할까요? 베드로의 장모는 고치심을 받은 후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섬기는 것, 봉사의 형태라는 것은 다양해도 그 봉사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봉사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은혜라면 봉사 자체도 은혜인 것입니다.
2025년도 우리 교회 표어는 다음 주에 있을 공동의회에서 결정되는데, “섬기는 것,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통해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곳에 함께 계신 예수님의 임재를 드러나게 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얼마나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올 한해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열정으로 주님을 섬겨 나갑시다.